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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야도(野都)' 부천의 현대 정치사(3)

1. 해방 이후 정부 수립기의 부천⓶

황인오 우보만리연구소 대표 | 기사입력 2024/11/21 [09:42]

[연재]'야도(野都)' 부천의 현대 정치사(3)

1. 해방 이후 정부 수립기의 부천⓶

황인오 우보만리연구소 대표 | 입력 : 2024/11/21 [09:42]

이승만 독재가 강화된 3대 국회

 

▲ 3대 부천의 국회의원 장경근     ©나무위키

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자유당의 장경근(1911~1978)이 부천군에서 당선되었다. 전체 당선자는 자유당 114석, 민주국민당 15석,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대한국민당 각각 3석, 제헌동지회 1석, 무소속 67석 총 203석이 선출되었다.

 

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주요 정당은 처음으로 후보자 공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선거는 신생 대한민국의 민의를 반영하는 선거가 이승만과 집권 자유당의 부정으로 민의를 현저히 왜곡한 선거였다. 신익희, 조병옥, 장면 등이 이끄는 야당인 민주국민당, 약칭 민국당은 출마 단계부터 경찰과 행정당국의 조직적인 방해와 선거운동의 탄압 등 부정과 공포 분위기 속에 치러진 선거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러한 부정선거의 결과로 이승만과 자유당은 장기집권을 확립하기 위한 사사오입 개헌이 강행하였다. 

 

이승만은 1952년 부산 파동으로 깡패와 군대를 동원해 국회의원들을 납치하여 이른바 발췌개헌으로 이제 막 자라나는 민주적 헌정질서를 파괴하였다. 이승만은 국회내 안정적인 여당 세력을 해야할 절실한 욕구를 가졌다. 초대 제헌국회와 2대 국회에서 온전한 여당이라고 할만한 의원단을 확보하지 못하여 자신의 의지를 제대로 관철하지 못하였다는 나름의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6.25 전쟁 중인 1952년이 되자 초대 대통령 임기 만료가 되어 재선되어야 할 이승만으로서는 당시의 헌법 체제에서는 대통령 재선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제헌국회는 헌법상 대통령 선거를 국회 간선으로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1948년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압도적으로 이승만이 다수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그러나 김구 암살과 반민특위 해체로 민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특히 말로는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면서 끝내 6.25 동란을 막지 못하고 수백만 국민을 도탄에 빠트리고 자신은 먼저 도주하면서 서울시민들을 적치하에 남겨둔 채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등 전쟁 수행 지도자로서 부패와 무능력의 끝판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수십만 장정들의 생떼 같은 목숨을 빼앗고도 제대로 된 수습을 하지도 못했다. 거기에 거창 양민학살 등 곳곳에서 무고한 국민을 적으로 몰아 학살하는 참극이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이러한 총체적 실정으로 인해 정상적인 선거로는 재선을 바라볼 수 없는 처지였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부산정치파동

 

국민방위군은 1950년 6. 25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3일 만에 북한군에게 서울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도주하여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부산에 임시수도를 설치한 뒤 그해 12월 부족한 국군 병력을 보충하는 후방 예비대로 창설한 부대이다. 그런데 48만에서 최대 60만에 이르는 국민방위군을 징집하고도 이를 제대로 관리할 예산과 체계를 갖추지 않은데다 국민방위군 사령관과 간부들이 그나마 부족한 예산을 대대적으로 횡력 착복하여 5만에서 9만명(20만명 설도 있다.)의 장정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얼어 죽는 참상을 빚은 대규모 부정부패 사건이다.

 

김윤근 사령관 등 고위 간부 5명이 총살되는 것으로 사건은 은폐 축소되었다.(국민방위군 사건의 전말은 링크를 참조하면 된다. https://v.daum.net/v/20240810111215494)

 

집권 4년 동안 온갖 헌정 파괴 및 인권유린과 전쟁의 참상밖에 보여주지 못한 이승만에 대해 국회 다수를 차지하는 반대세력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두되 실질적인 권한을 박탈하는 내각제로 개헌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대통령 간선제를 국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로 바꾸려 하였다. 당시로서는 경찰 등 행정력을 동원하면 국민들을 부정선거로 동원하여 손쉽게 당선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952년 1월 18일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를 상원인 참의원과 하원인 민의원으로 하는 양원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이 찬성 19표, 반대 143표, 기권 1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되었다. 이어서 4월 17일, 반이승만 국회의원 122명의 서명으로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고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이승만은 5월 25일 부산과 경남 일대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이날 밤부터 개헌안 주동 의원들을 체포하는 한편 다음날 26일에는 국회의원 40여명이 탄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납치하여 헌병대로 끌고 가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거리에는 백골단, 땃벌떼로 자칭하는 정치 폭력배들이 날뛰며 공포를 조장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장택상 국무총리는 국회해산을 협박하며 개헌을 추진하였다.

 

6월 21일 국회에 상정된 개헌안은, 이미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 직선과 양원제에 국회가 제안한 개헌안 중 국무총리의 요청에 의한 국무위원의 면직과 임명,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결의권 등을 덧붙인 절충안이었다. 폭력의 공포에 기세가 꺾인 야당에게 굴복의 명분을 주는 것에 불과하였다. 

 

경찰과 군대가 국회를 포위하고, 폭력배들이 국회 출입을 통제하는 가운데 7월 4일 밤 기립표결에 들어갔다. 그 결과 출석 166명, 가 163명, 기권 3명으로 개헌안은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양측의 개정안을 발췌하여 절충했다고 하여 이 개헌을 ‘발췌개헌(拔萃改憲)’이라고 한다. 7월 7일 제1차 개정헌법을 공포하였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부산정치파동’이라고 한다.

 

4사5입(四捨五入) 개헌 파동과 장경근

 

부산정치파동의 결과인 발췌개헌 헌법 체제에서 치른 총선거에서 승리한 자유당은 곧바로 헌법 개정에 착수한다. 이승만의 후계자로 꼽히던 이기붕이 국회의장이 되어 3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작업에 들어간다. 3대 국회 정수 203석 중 114석으로 과반수를 차지한 자유당은 첫 임시 국회가 열린 6월 15일까지 무소속을 영입하여 개헌선인 136석을 확보하였다.

 

9월 6일, 국무총리 폐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 조항 철폐(3선 허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2차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야당과 여론의 반발 속에 11월 18일 개헌안을 상정하여 11월 27일 표결에 부쳤다. 결과는 재적 203명, 출석 202명 중 찬성 135, 반대 60, 기권 6, 무효 1이었다. 헌법 개정에 필요한 재적의원 2/3 이상은 135.33명 이상이어야 하므로 찬성표가 136명이 나와야 하는데 1표가 모자란 135표가 나오자 사회를 맡은 자유당의 최순주 부의장은 개헌안 부결을 선포하였다. 자유당에서는 표결에 들어가기 전 의원들에게 1인당 50만 환(圜)씩의 보증수표를 돌리며 표 단속에 나섰으나 부결되었다. 

 

국회 산회 후 자유당 간부들이 대책회의를 하는 동안 이승만의 충복(忠僕)을 자임(自任)하는 장경근은 수학자인 서울대 최윤식 교수를 대동하고 경무대(청와대의 옛이름)에 들어가 이승만에게 ‘4사5입(四捨五入)의 원리’를 설명하였다. 두 사람이 경무대를 떠난 후 이기붕 국회의장과 최순주 부의장 등 자유당 간부들이 경무대에서 이승만에게 개헌안 부결을 보고하자 이승만은 찬성표가 135표면 가결된 것이니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다음날 28일은 일요일이었지만 자유당은 긴급 의원 총회를 소집하여 개헌안은 가결된 것으로 정리하고 의사록을 정정하기로 하였다. 최순주 부의장은 월요일인 29일 본회의에서 야당의 강경한 항의 속에 날치기로 개헌안 가결과 의사록 수정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4사5입 제2차 개헌 파동이다. 여기서 부천 출신 국회의원 장경근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이승만의 총애를 얻어 내무부 장관이 되는 발판을 만든 것이다.   

 

일제고등문관 장경근

 

부천군의 3대 국회의원이 된 장경근은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으나 14살인 1925년에 부천으로 와서 휘문고보를 거쳐 1936년 동경제국대학 법률과를 졸업했다. 제국대학 재학 중이던 1935년 11월 일본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1936년 5월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 시보에 임명되고 2년 뒤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1941년 3월 경성복심법원(고등법원 격) 판사가 되어 해방 때까지 근무하였다. 

 

전형적인 식민지 부역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장경근은 해방 후에도 철저하게 반민족, 반민주적인 삶을 살았다. 해방이 되자 미군정청은 장경근을 서울지방법원 수석판사로 임명하였고 법원조직법 개정에 따라 법원장이 되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친일부역자 처벌의 기운이 높아지자 서울지방법원장을 사임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하수인 장경근

 

1949년 1월 이승만은 그를 내무부 차관에 임명하였다. 내무부 산하 치안국, 경찰을 지휘하개 된 것이다. 반민족 행위자로 처벌받아야 할 장경근이 내무부 차관이 되어 1949년 6월 6일, 일제 고등경찰 최운하를 체포한 반민특위를 습격하도록 지휘하였다. 2일후인 6월 8일 장경근은 기자들 앞에서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자신의 지시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진 공권력 행사”라고 주장하였다. 장경근의 반민족 반민주적 행위는 이것으로도 부족하였던 모양이다. 이 시기 장경근은 이른바 ‘국민보도연맹’의 부총재이기도 했다. 후일 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학살극의 피해자가 된 보도연맹 사태를 유발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나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보도연맹 관련하여 장경근이 제대로 호명된 것을 들은 바가 없다.

 

6.25 발발 전인 1950년 5월 국방부 차관이 된 장경근은 1951년 6월까지 재직하였다. 전쟁 수행의 주요 책임자로서 국민방위군 사건에 큰 책임을 물어야 할 지위에 있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에 관해 장경근이 언급된 적은 없으나 당시의 직책으로 보아 수만 명의 애꿎은 젊은이들이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사태에 책임이 없을 수 없다. 

 

더구나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획책한 개헌 과정에서 사사오입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헌정 유린의 요인을 제공한 이가 바로 장경근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57년 2월 내무부 장관이 된 장경근은 그해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야당의 연설회를 경찰을 동원해 방해하여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이 사태를 책임지고 9월에 사퇴하고 자유당 정책위원장이 되었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4차례 한일회담의 한국 대표를 맡기도 했다. 민족의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자가 한일회담 대표를 했으니 회담에서 ‘식민지배는 조선에 이로운 것이었다’는 따위의 일본 대표 구보다의 망언을 제지하지 못한 것이다. 당시 구보다의 망언은 언론에 보도되고 민심이 들끓고서야 뒤늦게 외무부가 항의하는 소동을 연출하였었다. 제대로 된 우리측 대표였다면 그 자리에서 망언을 제지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등의 강경한 조치를 했을 것이다.

 

1958년 4대 국회의원으로 부천에서 다시 당선된 장경근은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 자유당 선거 기획위원과 정책을 담당하는 제7 부장을 겸하고 있었다. 내무부 장관이었던 그는 경찰력을 동원하는 구체적인 부정선거 방안을 만들어 치안국장에게 지시하였다.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이 퇴진하고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부정선거 책임자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다.

 

재판이 계류 중이던 1960년 11월, 입원해 있던 병원을 탈출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후 일본에 정착하여 동경의 ‘무라타(村田) 사법서사사무실’ 법률자문, ‘박종근 법률사무소’ 법률고문을 지내다가 1973년 8월 미국으로 건너갔고, 1974년 11월 다시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민족반역자인 그도 인생 말년이 되자 고국산천이 그리워지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 되어 지병인 당뇨병과 중풍이 심해지면서 정부에 귀국을 청원, 허가를 얻어 도피 17년 만인 1977년 5월 귀국하였고, 1978년 7월 역삼동 자택에서 6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후 반민족행위가 입증되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 ‘한국정당통합운동사’, ‘한국정치사’, ‘야당30년’, ‘친일파와 반민특위 나는 이렇게 본다.’ ‘나무위키’ 기타  <다음에 계속> 

 

▲ 황인오 회장     ©부천시민신문

황인오 회장은 가톨릭대 국사학과 2년을 수료하고,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우보만리연구소 대표, 동북아평화경제협회 이사, 사북항쟁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전(前) 부천시민연합 공동대표, 80년 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 민주통합당 오정지역위원회 공동위원장, 민주통합당 경기도당 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정책위 부의장, 더불어민주당 부천병지역위원회 수석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 글은 우보만리(牛步萬里)연구소 블로그(https://blog.naver.com/hino0398)와 ●카카오스토리 ‘황인오의 우보만리’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0912225787)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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