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문장에 “만일 누가 부자라면 그가 먹고 싶을 때 먹는다. 그러나 만일 누가 가난하면 먹을 것이 있을 때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부자는 먹고 싶을 때 먹지만, 빈자는 먹을 것이 생겼을 때 먹는다.
필자는 소위 ‘먹방(!)’이라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음식에 대한 과도한 탐닉과 쾌락이 중세 가톨릭 전통의 7대 대죄 중 하나인 ‘식탐’을 관장하는 악마 베엘제붑(Beelzebub)을 부른다는 유년 시절의 공포심 때문만도 아니다. 아마 인간이 음식의 노예가 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단순하고 동일한 행위에는 다양한 해석과 의미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먹는다’는 똑같은 행위 앞에서 부자는 사람의 식욕이 주체(주인)가 되어 음식을 취하고, 가난한 사람은 식량이 주체가 되어 그것이 존재하면 먹고 부재하면 굶어야 한다. 인간이 음식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부자는 식탐을 한 결과 살을 빼기 위해 운동을 하지만, 가난한 자는 먹고살기 위해 운동(정확히 노동)을 해야 한다. 가난한 자의 끼니에서는 사람이 음식보다 뒤로 밀려나는 ‘소외’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음식이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먹고 싶을 때, 배고플 때 먹는다는 것은 의식주에서 인간의 품격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음식이 인간을 택하는 사회는 비열하고 치졸한 사회이다. 얼마 전 독거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가 행정 당국에 의해 철거될 위기에 놓여있다는 언론 보도를 보았다.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들이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권리,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무너지지 않도록 할 책임과 의무는 인간 세상이 아무리 천박해지고 추잡해지더라도 반드시 지켜내야 할 최후의 도덕적 선이다. 먹거리 앞에서 뒤로 밀려나는 인간을 소유하고 있는 사회는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논할 자격이 없다. 과거 우리 사회는 이러한 기본적인 사회적 책무에 대해 치열한 갑론을박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필자는 “자칭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사회가 취약층 아동들에게 밥 한 끼 제공하는 문제로 과연 진보니 보수니 따질 문제인가”라며 우리 사회의 빈약한 공동체 의식에 심한 자괴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국가가 취약계층의 복지를 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 복지예산이 어떻고 보편적 복지니, 선별적 복지니 하는 따위의 사회경제적 분석의 서술은 하지 않겠다. 어디 먹는 것 한 가지뿐이겠는가. 문제는 사각지대이다. 어지간한 국민들은 그것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국내외 경제구조가 큰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자영업자들의 폐업은 속출하고 실업률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으며 물가는 착륙을 잊은 채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 ‘나와 내 식구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임을 절감한다. 그런 세상에서 사각지대는 죽음의 문턱이다. 최소한의 품격을 상실한 사회, 극단적으로 말해 그런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사회적 존경의 대상일 수 없다. 꼭 누군가가 고통받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거나 경험하지 않아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공동체 의식의 첫 번째 조건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에서 어느 순간에 바로 나 자신이 길잃은 한 마리의 양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추운 겨울이 시작됐다. 누군가에게는 하얀 눈이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계절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숨조차도 내뱉기 힘든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다. 「의무론」을 쓴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네가 가진 것 이상으로 베풀지는 말아라”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어찌 내가 가진 것의 갑절을 타인에게 베풀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흔한 말도 있듯이 품위와 존엄을 잃지 않은 시민들의 따뜻한 손길이 더욱 간절해지는 때이다. 아울러 하인이 주인 끼니 걱정해주는 이상한 나라가 더이상 아니길 바란다. 명품 디올백을 선물로 받는 여사님을 염려해주는 찢어진 천 가방을 든 괴상한 나라의 앨리스들이 없는 사회이길 바란다. 어느 책에서 신부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맺음하겠다.
“내 삶이 좋아지고 세상이 좋아지려면 ‘나만 없는 것’에 몰두하지 말고, ‘너에게 없는 것’을 응시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인생과 세상의 진보는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인간은 저마다 ‘없는 부분’을 분명히 가지고 태어나면서도 타인의 결핍을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타인의 결핍을 알아보고 공감하고 성찰하는 일, 그게 교육이고 그 내용이 바로 그 사회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울 수 없는 것보다 울어야 할 큰 이유는 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타인의 결핍과 슬픔을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울지도 못한 채 없음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울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언젠가 내가 울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도 누군가 함께 울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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