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외투쟁 1번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 평화민주당 총재로 야당을 이끌던 시절부터 부천은 정치적 배후기지였다.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확보한 후 1988년 4월에 열린 첫 총선거에서 김대중과 평민당은 국회 제1당이 되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가 공약으로 내세운 중간평가가 다가오자 김영삼, 김종필과 기습적으로 3당 야합을 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의 야합세력의 압도적인 의석에 맞서기 위해 때때로 장외투쟁을 벌여 그 기세를 바탕으로 국회 안에서의 열세를 어느 정도 보정한 것이다. 그때마다 장외투쟁의 선두기지로 부천이 선택되어 기세를 올렸다.
부천이 장외투쟁의 1번지가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부천은 호남 출신 주민이 다수를 이루어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와 야당에 대한 지지세가 강하여 쉽게 결집되는 곳이라는 점이다.
특히 전두환 반란집단이 1980년 5.18 학살극을 벌이면서 격화된 반독재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최대 인구 집중지인 서울과 인천을 잇는 연담도시로서 부천의 역할이 매우 컸다. 부천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서울에서 밀려나거나 서울 입성을 예비하는 이들의 정착지이기도 하고 주요한 공업 밀집 지구이기도 하여 젊은이들과 노동자 인구 비율이 높은 도시였다. 그 때문에 노동운동이 활발하여 이른바 현장투신 대학생들이 모이기 쉬운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이 부천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역량이 결집하게 하는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천 지역의 민의가 어떤 역사적 궤적을 지나왔는지 살피고자 한다. 10여년 전에 비해 10만 가까이 인구가 줄어들어 국회의원 정수도 4명에서 3명으로 줄어들었으나 시민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 가운데 하나인 지역 정치의 궤적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호사가의 한가로운 취미가 아니라 현재와 장래의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함이다.
부천군 설치
부천이라는 지명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14년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한 것이었다. 인천과 부평은 역사적으로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각각 도호부였다. 도호부는 중국에서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하던 군정(軍政) 지역의 행정단위였다. 우리나라도 고려 초기에는 군정 행정단위였으나 나중에는 일반 행정구역의 하나로 설치되었다.
인천의 영역을 현재의 중구와 동구 지역인 제물포 개항장 일대로 축소시키고, 인천부의 나머지 지역인 주안, 문학, 남동, 소래, 영종도, 용유도, 덕적도와 부평군 전역을 통합하면서, 부평의 부(富)와 인천의 천(川)을 따 부천군(富川郡)을 설치하였다. 부천군청은 문학면 관교리(현재의 남구 관교동)에 있던 인천도호부 관아를 그대로 승계하였다.
그 뒤 일제 강점기와 해방 국면이 되어 여러차례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군의 경계 변동이 컸다. 1973년 부천군이 폐지되고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영종도를 비롯한 도서 지역을 비롯한 많은 면적이 부천에서 제외되는 등 큰 변화를 겪었다. 1983년 시흥군 계수리와 옥길리 일대가 편입된 것을 마지막으로 현재의 경계를 확정지었다.
현재의 부천시와 시승격 이전의 부천(군)은 이름만 같을 뿐 지리적으로는 상당히 다른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2023년)가 부천시 승격 50주년이었다면 올해는 '부천'이라는 지명이 생긴 지 110년 되는 해이다.
부천의 첫 국회의원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 4대 원칙에 따른 국민 투표, 즉 재산이나 성별 신분의 제한을 두지 않는 보통 선거의 원칙, 투표자가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를 묻지 않는 비밀투표의 원칙, 재산과 성별, 나이와 학력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 1인 1표의 가치를 가지는 평등의 원칙,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하거나 대리하게 하지 않는 직접 투표의 원칙에 의한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제헌 국회는 총 200명의 당선자 중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관료와 기업가였던 친일세력이 중심이면서 이승만을 지지하며 사실상 정권을 독차지하려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은 29명, 이승만의 직계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통칭 독립촉성회, 또는 독촉은 55명, 대동청년단 12명, 민족청년단 6명, 독립촉성농민연맹 2명, 그밖에 대한노총, 조선민주당, 독립노농당 등 11개 정당과 단체가 각 1명씩 모두 11명을 당선시키고 85명이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무소속에는 한민당 계열과 친 이승만 성향 세력과 중도 세력 등 다양한 분포를 이루었다.
이 선거에서 부천군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배출되었다. 부천군 첫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사람은 이유선(1903~1974)이다.
이유선은 1903년 현재의 인천시 부평구 구산동 출생으로 인천공립보통학교와 배재고보를 졸업하였다. 이후 부천군에서 구산 진영학원을 설립, 운영하였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 민족잡지 발간과 강연을 이유로 투옥되기도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다만 투옥 사유와 진영학원의 성격 등 구체적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유선은 8.15 광복 후 친 이승만 성향의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이승만 귀국환영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것을 계기로 이승만을 추종하는 정치 활동을 했다.
제헌국회는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는 반민특위 구성과 농지개혁 등 신생 독립국의 기틀을 갖추기 위한 법안과 제도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한민당 세력 등 친일부역 세력과 타협하여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려는 작업을 번번이 방해하여 반민특위를 중도에 해체하는 등 반동과 퇴행을 일삼았다. 이유선은 이러한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책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1949년 3월 김약수 부의장 등 많은 의원들이 자주독립국가의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외국군 철수 결의안을 상정하였으나 친 이승만 계열 의원들은 외국군 철수 반대 결의안을 제출하였는데 이유선은 여기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유선은 제주 4.3 진압을 반대하는 국군 14연대의 여순 사건과 4.3사건의 철저한 진압을 주장하는 등 반민주적 의정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1952년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한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야당 성향의 무소속 출마자 박제환에게 밀려 3위로 낙선하였다.
1956년의 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득표율 4위로 낙선하였다. 이후 1974년 서울 정릉에서 사망하였다.
2대와 5대 국회의원 박제환
지봉(芝峯) 박제환은 1905년 2월, 현재의 부천 원미구 역곡동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경성, 즉 서울의 수하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으나 4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 당시 학내에서 만세운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휘문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 휘문고보를 수료하고 일본 도시사(同志社)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도시사대학 재학 중에 학생의 신분으로 1927년 독립운동 진영의 좌우 합작으로 설립한 신간회(新幹會) 교토(京都) 지부장을 맡았다. 1929년 도지사대학 법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932년 경기도 부천군 사회과 주사로서 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경기도청 산하 기관에서 근무하던 중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인정식을 도왔다는 이유로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에는 경기도청 식량과장으로 근무하였으나 하위직이지만 총독부 관리를 지낸 자신의 소극적인 친일반민족행위 경력을 부끄러워하다가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한 뒤 공무원직을 사퇴하였다. 1946년 자신이 소유한 농지를 매각하여 공립 부천농업중학원(현 부천중학교)를 설립하고 이를 국가에 헌납하여 공립학교로 전환하게 하였다. 1947년에는 한강수리조합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이유선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6.25 동란 중에 국회의원으로 취임하여 국민들이 겪는 전쟁의 고통을 해소, 경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얼룩진 제3·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의 장경근에 밀려 낙선하였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하원인 민의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고 민정구락부에 가입하였다. 1960년 8월 장면 총리 정권에서 농림부장관이 되었으나 이듬해인 1961년 박정희의 5·16군사정변으로 두 달간 불법으로 부당하게 구속되는 탄압을 겪고 퇴임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군·시흥군·옹진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옥조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군·시흥군·옹진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오학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후보에 반기를 들고 윤보선을 따라 신민당을 탈당하여 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후에는 정계를 떠나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종로 천주교회 사목위원회 위원, 역곡 천주교회 사목위원회 고문으로 종교활동에 전력하였다. 12대와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규식의 숙부이기도 한 박제환의 저서로는 『지봉한담(芝峰閑談)』(1992)이 있다. 1995년 3월 역곡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다음에 계속>
[필자 소개]
황인오 회장은 가톨릭대 국사학과 2년을 수료하고,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우보만리연구소 대표, 동북아평화경제협회 이사, 사북항쟁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전(前) 부천시민연합 공동대표, 80년 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 민주통합당 오정지역위원회 공동위원장, 민주통합당 경기도당 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정책위 부의장, 더불어민주당 부천병지역위원회 수석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글은 우보만리(牛步萬里)연구소 블로그(https://blog.naver.com/hino0398)와 카카오스토리 ‘황인오의 우보만리’,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0912225787)에도 각각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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