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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야만의 시대’의 그림자

[review]1980년 사북항쟁에 대한 기록...연극 <말을 버린 사내> 관람기

고일용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4/09/26 [10:31]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야만의 시대’의 그림자

[review]1980년 사북항쟁에 대한 기록...연극 <말을 버린 사내> 관람기

고일용 논설위원 | 입력 : 2024/09/26 [10:31]

▲ 고일용 논설위원

5·18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나기 불과 며칠 전, 강원도 정선 사북에서 열악한 노동환경에 저항하여 광부들의 항쟁이 일어난다. 사북항쟁이다. 

 

1980년, 국가 산업인 석탄업에 종사하며 나라의 일꾼으로 환대받던 광부들. 그 이면에는 1년에 180여 명씩 죽어 나가는 열악한 노동환경, 극한의 삶의 현장으로 내몰리던 그들과 가족들의 현실이 존재했다.

 

1980년 4월 21∼24일까지 국내 최대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 사북영업소 광원과 가족 등 6000여 명이 어용노조와 열악한 근로환경에 항거, 나흘간 사북읍을 점거한다. 당시 동원탄좌는 국내 석탄 생산량의 9%를 담당하던 최대 민영 탄광업체였지만 이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이에 1980년 4월 21일 노동자들은 노조지부장 부정선거 무효화와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자 했으나, 경찰은 이를 불허했다. 이후 노동자들과 경찰의 충돌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경찰과 민간인 80여 명이 부상 당했다. 그러다 4월 24일 사태 종식에 합의하였으나, 이를 ‘광부난동사건’으로 규정한 계엄사령부 산하 합동수사단은 4.24 합의를 깨고 주모자 등 81명을 폭도로 몰아 계엄포고령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으며, 이원갑 씨 등 7명은 실형을 선고받고 21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최근 사북항쟁을 다룬 한 편의 연극이 성황리에 공연되고 있다. ‘말을 버린 사내’.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무언가 철학적 돌덩어리를 얹어주는 느낌이다. 말을 버렸다니...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즐길 수 있고 몰입할 수 있으며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최고로 행복한 삶이기에 표현은 삶의 흐름 속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고도 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전혀 무가치하지는 않음을 이 연극은 보여준다.   

 

연극은 1980년 5월, 사북에서 일어났던 탄광 노동자들의 항쟁과 국가 권력에 의해 잔혹하게 짓밟힌 영혼들의 이야기이다. 광부와 광부 부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고문, 서로를 고발하며 원망과 불신으로 점철된 잔인하고 부조리한 야만의 시대. 필자의 20대 시절과 오버랩되어 불편함을 다소 감출 수 없었다.

 

그야말로 ‘즐길 수 있고 몰입할 수 있으며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삶’이 처절하게 파괴된 것이다. 파괴된 삶의 저 너머로 오랜 시간의 침묵이 표현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연극은 가난하지만 나름대로 행복했을 법한 삶의 공동체가 국가 권력의 폭력 앞에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가를 함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현상적으로는 개인 간의 비극과 참회를 모티브로 삼고 있지만, 사실은 공동체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버린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제의 성격이 강하다.

 

1980년, 그날로부터 30년이 지난 어느 날, 폐암 4기 환자인 아버지 ‘영식’이 정선 사북역에서 객사한 상태로 발견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30년간 입을 닫고 무능력하게 살아온 광부 아버지 영식과 그에게 정이 없던 딸 미옥의 이야기이다.

 

노래 잘 부르고 사람 좋아하며 늘 유쾌했던 아버지는  그날 이후 말을 버렸다. 아버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긴 세월 동안 침묵해야 했단 말인가. 국가 권력의 강압과 폭력에 의해 영식 한 개인뿐만 아니라 모두가 말을 버린 것이다. 하지만 종국에는 긴 침묵이 오히려 버린 말보다 더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동시에 인간에 대한 존엄과 예의에 대해 근원적으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인권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는 양도할 수 없는 보편적 가치이다. 현대사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는 수없이 많은 인권 탄압이 있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권과 존엄권을 소유하고 통제했다. 오늘날 물리적 폭력은 많이 누그러졌지만 법과 제도라는 공권력을 통해 교묘하게 이루어지는 인권 유린은 아직도 만연해 있다. 

 

연극 ‘말을 버린 사내’가 노동과 인권,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희생자들이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미 다수의 희생자들이 세상을 등졌다고도 한다.

 

사북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또 하나의 치명적인 역사다.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책무는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다. 그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인 사과와 반성이 있길 바란다. 그리고 국가는 특별법 제정을 통한 국가배상의 책무를 다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연극은 탄탄한 각본, 치밀한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과 코러스가 절묘한 케미를 이루어 연극 본연의 재미도 더해준다. 필자로서는 장기 공연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북항쟁 44주기인 올해 가을, 매우 의미있고 추천할 만한 연극 한 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 공연 포스터 및 소개글  © 인터파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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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2024/09/27 [14:47] 수정 | 삭제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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