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4년 만에 재등판하여 변함없이 폭언과 저주를 퍼붓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 건강 염려설에 시달리다 결국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한 조 바이든을 대신해 구원 등판한 해리스 부통령의 모습이 연일 TV 화면을 장식한다. 만약 해리스가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 두 번째 '흑인' 대통령이자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다.
대세론을 등에 업은 트럼프의 인기가 주춤하는 듯하지만, 트럼프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에게 트럼프는 방위비 분담에 불만을 갖고 주한미군 철수라는 협박,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의 역사적인 북미회담, 그리고 대(對)중국 강경 노선을 펼치는 전사 정도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2021년 1월, 대선 패배에 불복한, 준군사조직을 방불케 하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광기 어린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이 강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현대 민주주의의 성지라고 하는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니 말이다. 전 세계인의 눈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미국 민주주의는 평화로운 정권 이양에 실패하면서 급격히 후퇴했다. 도대체 미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에 무슨 문제가 있길래 위험에 빠진 것일까? 비단 미국만의 문제일까? 마침 그 궁금증을 자세히 풀어줄 괜찮은 신간이 한 권 나왔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부제가 말해주듯이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사실 필자는 최근 한국 정치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민주주의를 민주화해야 한다”고 자주 언급한다. 마침 이 책의 목차 마지막에 적혀 있었다.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다”. 저자들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테러 이면에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과 현재와 미래 세대의 변화를 가로막는 낡은 민주주의 체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트럼프의 인기를 기독교 백인 남성들의 공포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미국의 엘리트층이 인종 대체를 계획하고 있으며, 백인들은 점차 그 권력의 핵심으로부터 밀려나리란 공포이다. 소위 ‘거대 대체 이론’이다. 다시 말해 ‘다인종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인 것이다. 미국은 이미 다인종 사회로서 백인들은 이미 다인종의 일부이다. 미국은 더이상 백인들의 나라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어떻게 극단적인 일부 백인들의 지지만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미국의 독특한 입법·사법에 걸친 법과 제도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사회적 약자인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으로서의 ‘반 다수결적 장치’들을 다른 극단적 소수가 차지함으로써 다수의 의지에 반하는 정책 입안자들이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저자들은 미국이 ‘상원’, ‘선거인단’, ‘필리버스터’, ‘사법심사’ 같은 제도를 이용해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상황에 직면했다고 주장한다. 다수가 더 이상의 다수가 아닌, 족쇄를 찬 다수인 것이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체제가 극단주의자와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갈 때 민주주의는 치명적이다. 그들은 넥타이 차림의 주류 정치인이며 민주주의에 노골적으로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극단주의 세력을 묵인하거나 은밀하게 지원하면서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들을 파괴한다. 트럼프는 민주주의의 3대 원칙을 크게 어겼다.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것, 권력 쟁취를 위해 폭력에 의존한 것, 그리고 극단주의 세력과 동맹을 맺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는 재선에 도전할 자격을 이미 상실한 셈이다.
자, 이제 우리 얘기를 해보자. 그런데 어디에서 많이 본 모습이다. 멀리 미국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바로 대한민국 주류 정치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그들은 제주 4·3 사건 조작설, 광주 민중항쟁 북한군 침투설, 식민지 근대화론 등으로 점철된 극단주의자들과의 은밀한 연대를 과시한다. 극단적 사고의 주인공들이 집권 여당의 최고위원과 장관 자리에 앉아 있다. 주류 정당이 전제적인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묵인하고, 혹은 이들에 대해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할 때 민주주의는 곤경에 처한다. 그들은 독재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조력자가 된다. 실제로 역사에 걸쳐 수많은 독재자와 사이비 민주주의자들 사이의 연합은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국민 다수의 의지가 반영된 정책과 법안에 대통령은 거부권을 남발한다. 비단 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니다. 야당은 제한적 실행이 필수불가결인 ‘탄핵’을 전가의 보도로 활용한다. 거부권도, 탄핵도, 법에 명시된 대통령과 국회의 고유 권한이지만 모든 것을 ‘법대로만’ 하려는 시도는 정치의 실종과 시대착오적 결정을 만들어낸다. 변화를 위한 다수의 의지는 묵살되고, 변화를 거부하는 소수의 의지가 실현된다. 표면적으로만 민주주의에 충직한 정치인들과 더불어 ‘1987년 체제’라는, 즉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낡은 헌법 체제와 그에 기반한 정치의 왜곡도 심각한 문제다. 선출직과 비선출직 권력의 횡포, 특정 지역과 집단을 과도하게 대표하는 선거 제도, 비례성이 무시되는 승자 독식의 선거구제, 선택적으로 규정되는 합법과 불법의 향연, 독재의 평범성이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우리가 신성하게 여겨왔던 정치 체제와 헌법적 가치가 사실은, 기묘한 타협과 한계로 가득찬 제도라는 것과 그런 이유로 정치적 반동을 획책하는 자들의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들은 민주주의 위기의 해법으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처방한다. 극단적 소수가 다수의 의지에 반하는 정책을 시행하려 할 때, 압도적 다수가 이를 제지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것이 궁극적으로 상대적 약자로서의 ‘소수’를 보호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민주화한다는 것은 새로운 ‘자기 재조직화’의 다른 이름이다. 미국의 시민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된다. 더불어 한국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해 족쇄를 찬 다수의 국민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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