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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 부천’ 품격 상실한 ‘정지용 향수길’ 조성
고향 옥천에 ‘정지용 향수길 80리’ 있어 아류亞流 전락 농후
기사입력  2020/07/13 [16:28] 호수 165   구자룡 시인
자료 실증 없이 진행...인용문에서 '사실 발굴자 이름' 삭제 훼손   ▲ 구자룡 시인 캐리커처   소사천에 있었던 흙다리몇 년 전이었다. 사무실로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복계된 심곡천 중, 소명여고 앞에서 부천소방서까지 뜯어내 서울의 청계천처럼 만든다는 시공사의 직원이었다. 그때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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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실증 없이 진행...인용문에서 '사실 발굴자 이름' 삭제 훼손

 

▲ 구자룡 시인 캐리커처  

소사천에 있었던 흙다리
몇 년 전이었다. 사무실로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복계된 심곡천 중, 소명여고 앞에서 부천소방서까지 뜯어내 서울의 청계천처럼 만든다는 시공사의 직원이었다. 그때 직원은 어디서 알고 왔는지 정지용 이야기를 꺼냈다. 옛날 소명여고 앞 소사천이 흐를 때 성당을 넘나들던 정지용이 만든 무슨 다리가 있었다는데, 그 자료를 달라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의 성가 수녀원 안, 소림별장이 있던 곳에 정지용이 소사성당을 창립했다. 이때 정지용이 신자들과 소사천을 건너 성당 다니기가 불편해 신자들과 합심하여 외나무다리를 만들었는데 해마다 장마가 오면 떠내려가곤 했다. 그 후 신성우 신부가 흙으로 덮어 만들었다고 해서 ‘흙다리’가 되었다. 이 자료를 고증과 함께 그때 그 사진이 있으면 제공해 달라는 것이다.


내가 한마디 물었다. 이 자료를 제공하면 무엇을 주겠느냐고? 다시 말해 고증료를 주겠느냐? 아니면 고증자의 이름이라도 새겨 넣어 주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무색하게도 둘 다 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냥 돌아갔고, 지금 심곡천이 시작되는 소명여고 앞에 정지용의 기록이 없는 이유이다.

▲ 정지용에 대한 소개 글. 그가 주로 왕래했던 곳을 소사본동이 아니라 '소사동'이라고 적었다.  ©부천시민신문

정지용의 흔적 없는 ‘향수길’
지난 2월 부천시와 소사본동에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정지용 향수길’을 조성했다. 그간 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완공된 줄은 몰랐다. 그런데 <부천시민신문> 183호(2020년 6월29일∼7월12일) 보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약 3억6천만 원의 예산을 퍼부어 만든 것이 왜곡, 훼손, 오류투성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정지용 시인이 소사동에 살았던 사실을 최초로 발굴한 필자의 이름도 없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싶었다.


지난 7월 1일 장맛비가 내리던 오후,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해 찾아가 보았다. 서울신학대학 정문에서 왼쪽으로 산새공원 입구까지 장장 600여 미터 담벼락에 정지용의 시를 도배하다시피 걸어놓았다. 가끔 조형물도 있었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길’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정지용 시인이 돋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안타까워 보였다. 정지용 시인의 고향, 옥천의 향기가 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천의 향수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정체성이 없어 보였다. 작품 아래 주차한 차량에 가려 작품을 제대로 읽어볼 수 있는 곳은 불과 몇 곳에 지나지 않았다. 불편을 넘어 짜증이 낫다.


‘정지용 향수길’이라는 이름에도 의문이 들었다. ‘향수鄕愁란’ ‘고향을 그리워하다’란 뜻인데, 정지용 시인의 고향은 충북 옥천이다. 부천은 잠시(3년) 살다 간 곳일 뿐 그의 고향은 아니다. 그러니 ‘향수길’ 이라는 단어가 전혀 걸맞지 않는 다.

 

소사성당 창립...기차 타고 서울로 통근
향수길 시작 지점에는 ‘부천 소사동에 남겨진 시인 정지용의 흔적’이라는 설명과 함께 작품이 설치된 곳을 표시한 지도도 설치돼 있다. ‘흔적痕迹’이라 함은 ‘어떤 일이 진행된 뒤에 남겨진 것’을 말한다.


정지용 시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부천에 기거하는 동안 이렇게 많은 작품을 남겼나 오해를 부를 수도 있겠다. ‘부천에 남겨진 흔적’이라면 적어도 부천에서 활동한 내용을 우선 기록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 시 세계를 논해야 할 것이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정지용 시인이 부천에 남긴 흔적은 이렇다. 정 시인은 서울에서 살다가 1943년 당시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 89-14번지로 이주해 1946년까지 약 3년을 살았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예배를 보기 위해 인천 답동에 있는 성당을 왕래하였다. 그러다 집 옆에 소사공소가 있는 것을 알고 부천 신자들과 함께 그곳에서 예배를 보았다. 신자가 점점 늘어나자 미군정으로부터 적산가옥인 소림별장을 얻어 소사성당을 창립하였다.


당시 정지용은 휘문고보와 이화여대에 재직하였기에 평일에는 서울로 출퇴근을 하였을 것이다. 기차는 소사역(지금의 부천역)에서 탓을 것이고, 소사성당까지는 경인철도를 건너 현재의 소명삼거리 부근을 걸어 다녔을 것이다. 이렇듯 그의 흔적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건만, 왜 이런 역사적인 장소를 외면하고 흔적이 전혀 없는, 엉뚱한 곳에 ‘향수길’을 조성했는지?, 고증은 하였는지 궁금하다. 
 
왜 발굴자의 이름을 삭제했을까?

▲ 사진 왼쪽이 현재 부착돼있는 글이다. 옥천신문 원문에서 발굴자인 구자룡 시인의 이름만 뺐다. 오른쪽은 옥천신문 원문     © 부천시민신문


그런데 정작 놀란 것은 향수길이 시작되는 산새공원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이었다. 정지용 시인이 소사에 살았다는 유래를 알리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필자가 1987년 부천 천주교 100년사를 정리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정지용 시인은 월북 시인으로 알려져 있어 반공이 국시인 상황에서 이런 내용을 말할 수가 없었다.


안내판에 적힌 신문 기사는 19년 전, 옥천신문(2001년 5월 15일 570호)에서 정지용 시인이 부천으로 이사 온 사실을 발굴한 필자를 인터뷰한 것이다. 그런데 원문에 발굴자인 필자의 이름이 무려 네 번씩이나 등장하는데도 여기서는 단 한 번도 쓰지 않고 모두 삭제해 버렸다. 왜 그랬을까? 일반인이 타인의 저작물을 수정하는 것도 엄연한 저작권 위반인데 공공기관 더욱이 부천시에서 진행한 사업에서 원문을 훼손하면서 필자의 이름을 뺀 연유가 궁금하다. 실수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교묘하고,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도 이 글이 인용된 출처까지 친절하게 표기를 하였다. 엄연한 서류 조작이고 공문서 위조, 저작권에 위배된 일을 스스로 자행하다니….


다시 말해 부천시의 계획된 야비野卑한 음모陰謀라고 밖에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발굴자인 필자가 아직까지 부천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러고도 지금까지 주무관청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설치 작업을 하기 전에 내용을 검토했을 것이고, 설치 후 감수도 했을 텐데, 실수라고 하기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것은 남의 공을 빼돌려 자기의 공으로 돌리려는 자의 속셈이다. 그래서 표창장이나 타고, 진급하고, 출세하려는 그런 유치한 인간의 짓일 것이다. 이런 일이 비단 이번만은 아니다. 그동안 부천시에서는 필자의 자료를 무단 복제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남의 자료를 썼으면 그 출처를 밝혀야 하는데, 마치 자기네들이 발견한 것처럼 서슴없이 공적으로 쓰고 있다.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라! 
 
빛 좋은 개살구가 된 '부천 문화도시'
왜곡은 또 있다. 안내판 아래 소사성당이라고 소개한 사진도 왜곡되었다. 이 사진은 정지용 시인이 창립한 그 성당 건물이 아니다. 부천에는 소사 성당 건물이 세 군데나 있다. 1946년 4월 6일 정지용이 창립한 일명 소림별장 건물(부천시 소사동, 2016년 성가수녀회에서 파괴)과 1954년 11월 28일 신성우 신부가 건립한 건물(부천시 소사동 산 1번지, 성가수년원 안), 그리고 1960년 10월 20일 준공한, 현재 소사삼거리에 있는 소사성당(부천시 심곡동 480번지) 건물이다.


부천과 정지용 시인이 관련된 자료는 필자가 스크랩해 둔 것이 있다. 동아일보(1988년 1월 19일)를 비롯해, ▲부천정론시민신문 제2호(1989년 5월 2일) ▲소사성당 반세기 소식지(1990년 8월 19일) ▲부천문단 창간호(1990년 5월 30일) ▲소사성당 반세기(1991년 12월 27일) ▲한국수도권일보(1992년 1월 14일) ▲부천정론시민신문(1993년 5월 7일) ▲부천신문(1993년 6월 4일) ▲부천작가 제19호(2019년 11월 30일) ▲부천시민신문(2019년 12월 16일) 등등이다.


하지만 이번 정지용 시인의 향수길을 조성하면서 부천시에서는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자료나 자문을 요청한 일이 없다. 물론 정지용 시인의 자료는 굳이 필자를 찾아오지 않더라도 인터넷을 검색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머나먼 옥천까지 가서, 그것도 19년이 지난 옛날 것, 하지만 가장 먼저 밝힌 내용도 아닌 것을 인용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자료를 인용함에 있어서는 가장 먼저 발표된 사료를 인용하는 것이 기본인데…. 그걸 또 훼손해서 고증자의 이름을 굳이 빼고 기록을 남겨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부천시는 이 의문에 대해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번 일은 부천이 추구하는 ‘문화도시 부천’과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부천’에 역행하는 일로 스스로 먹칠을 하였다. 아니, ‘빛 좋은 개살구’가 되고 말았다.


“부천시장님,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정말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코로나19로 정신없으시겠지만 한번 살펴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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