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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천에 남긴 지용의 흔적을 찾다
소사본동에 ‘정지용 향수길’ 추진은 사실 왜곡,,,기록에 따른 '길' 복원해야
기사입력  2019/12/16 [07:21]   구자룡 시인, 사진= 나정숙 기자
▲ 정지용 선생이 거주햇던 곳으로 알려진 경인로 한 상가에 복사골문학회에서 설치한 설명과 현판. 답사에 나선 필자가 현판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부천시민신문   필자는 지난 1986년 <소사 본당 반세기(1991, 소사천주교회)>를 집필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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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용 선생이 거주햇던 곳으로 알려진 경인로 한 상가에 복사골문학회에서 설치한 설명과 현판. 답사에 나선 필자가 현판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부천시민신문

 

필자는 지난 1986년 <소사 본당 반세기(1991, 소사천주교회)>를 집필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어느 날 우연히 납북 시인 정지용이 부천 소사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매우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전두환 군사정권이면서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 전이어서 이러한 내용을 알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 1988년 정지용을 비롯한 월북 작가들이 해금되어서 이 사실을 1989년 8월 12일자 <부천시민신문> 제2호 ‘복사골 문학기행’이라는 기획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렸다.

 
1993년 5월 17일, 정지용의 큰 아들 정구관(당시 65세 의정부시 거주, 2004년 작고) 씨가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부천을 방문했다. 그 때 온 가족이 소사로 이주한 이유에 대해 “마치 고향 옥천 같아서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도 한국현대시의 큰 인물이 부천에 살았다는 사실에만 흥분했지 이사를 온 이유나 부천에서의 행적 등을 자세히 추적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 정지용을 잊고 지냈다.

 
그러다 2019년 가을, 그동안 묻어 두었던 정지용의 행적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마침 10월 22일 부천시가 소사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소사본동에 ‘정지용 향수길’ 조성에 대한 주민 설명회를 개최했다. 부천시와 소사본동 행정복지센터가 마련한 이날 설명회에서는 소사 성주산 가족 산책길 옹벽에 향수의 작가 정지용과 관련한 그림과 시 등을 그리고 주변 녹지대를 정비한 이른바 ‘정지용 향수길’을 2020년 2월까지 완료한다는 내용이었다.    

 
<향수>로 잘 알려진 시인 정지용은 1943년부터 1946년까지 약 3년간 부천에서 살다 서울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는 휘문고보 교사였고, 8·15광복과 함께 이화여자대학교 문학부 교수로 옮겨 문학과 라틴어를 강의했으며, 천주교 재단에서 창간한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역임한 것으로 전한다. 

▲ 정지용 선생이 거주하던 바로 뒷쪽에 있는 이곳이 부천 최초의 소사공소가 있던 곳이다.(현재의 모습)     ©부천시민신문


정지용의 장남 정구관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이 거주한 곳은 부천시 소사본동 89-14로 새주소로 부천시 경인로 316이다. 지용의 집 옆, 부천시 경인로 314 쯤에 소사공소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지용이 부천 소사로 이주한 이유는 아무래도 부천 출신(부천군 옥산면 벌응절리 능골, 현 부천시 역곡1동에서 출생)으로 국회의원과 농림부장관을 지낸 지봉 박제환 장관과의 관계를 부인할 수 없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행한 <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두 사람은 휘문고보 1년 선후배 관계로 만나 1923년 일본 동지사대학에 입학, 5년여 동안 같이 하숙을 했던 인연이 있었다. 유학 후 돌아와 박제환은 1932년 경기도 부천군 사회과 주사로 발령을 받아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5년 경기도청 식량과장을 맡았다가 해방 후인 1946년 2월 사직했다. 

 
일제는 국가총동원법 이후  「조선직업소개령」(1940)에 이어 1942년 2월  「조선인 노무자 활용에 관한 방책」을 발포해 모집방식이 아닌 관 알선을 통해 사실상 조선인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해 갔다. 정지용은 이런 급박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1943년 늦가을, 그의 나이 42세 때, 고향인 옥천과 비슷한 ‘부천 소사’로 오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소사는 당시 경인전철이 있어 근무지인 휘문고보나 이화여대로 통근하기에 유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고향인 부천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박제환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지용은 1946년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정지용이 약 3년간 부천에서 거주하면서 한 일은 소사공소를 소사성당으로 승격시키고 초대 신부를 맞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정지용은 천주교 신자였다. 윤 모 씨와 정지용의 장남 정구관이 증언한 내용이다.

 
그런데 지금 정지용의 흔적이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다. 바로 소사도시재생사업 때문이다. 소사도시재생센터에서 진행하는 이 사업은 소사본동 성주산 가족 산책길을 정비하고 옹벽에 정지용을 테마로 그림과 시 등을 그려 이른바 ‘정지용 향수길’을 조성한다고 한다. 그런데 왜 정지용과 전혀 관련이 없는 곳에 조성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럽에서는 유명한 사람이 말을 타고 지나간 자리조차 관광지로 만들어 산업화한다고 한다. 조그마한 흔적을 침소봉대는 하지만 없는 사실을 만들어 왜곡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정지용 향수길’은 본지 174호(2019년 12월 9일자 NEW 부천시민신문 1면)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선 ‘향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인데, 그의 고향은 부천이 아니라 옥천이다. 태어나지도 않은, 3년 살고 간 곳을 ‘고향’이라 붙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 옥천에는 이니 그를 기리는 ‘향수 100리’ 길이 조성돼있다. 굳이 비슷한 아류를 만들어 개인도 아닌 공공기관에서 시민들에게 잘못된 역사 인식을 심어주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지난 10월 향토사학자 양경직 선생이 여러 장의 지도를 퍼즐 맞추듯 맞추어 1940년대 부천의 모습이 담긴 지도를 복원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중에는 정지용 시인이 다니던 옛 소사성당 과 소사공소 다니던 길, 서울로 가기 위해 소사역으로 다니던 길도 잘 나타나 있었다. 그야 말로 정지용 선생의 동선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소사본동에서 엉뚱한 곳에 ‘향수길’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하고 몇 차례 이 지도를 근거로 현장을 답사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자주 이용하였을 것으로 예상되는 3개의 동선을 복원해보았다.  

 
정지용 길 1: 주일마다 소사공소 다니던 길  

▲ 정지용 푯돌이 새겨진 건물. 셔터문과 건물벽 두곳에 같은 글귀를 적어 놓았다. (거주지)    © 부천시민신문


첫 번째는 그가 거주하던 부천시 소사구 경인로 316번길(부천시 소사동 91번지 또는 부천시 소사본동 89-14)을 중심으로부터 시작 된다. 이곳에는 1993년 5월 30일 복사골문학회에서 세운 “여기는 현대시의 큰 별인 정지용 선생이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약 3년 동안 은거하면서 시심詩心을 키우던 곳입니다”라고 적은 푯돌이 부착돼있다. 사유재산인 건물에 부착한 관계로 겨우 글씨만 새겨놓아 초라하기도 하고 자칫 잘 모르고 가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것마저도 그동안 선생의 흔적을 찾아온 필자와 복사골문학회가 중심이 되어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동안 소사본동에서는 무엇을 했는지 푯돌은 마모磨耗의 흔적이 역력하다. ‘수리 좀 했으면 좋으련만….’

 
증언자들에 따르면 1943년 정지용이 이사를 왔을 무렵 집 앞에 개울물이 흘렀다고 한다. 이곳에서 소사삼거리 방향으로 한 10미터쯤 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돌면 이편한 마트가 보인다. 세종병원 후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면 4미터 폭의 비교적 좁은 길이 나온다. 부천시 소사구 경인로 316번 길이다. 조선시대에는 말을 타고 다니던 큰 길이었고, 일제 강점기 때는 자동차가 다니던 길이라고 한다. 세월이 지마면서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옛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 경인로 316번길 일대     © 부천시민신문

 
이곳에 있던, 지금은 사라진, 고추방앗간 옆집이 정지용이 다니던 소사공소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경인로 314번길이 되어 금성전업사와 금영공구사가 들어서 있다. 이 길이 바로 “꿈엔들 잊을 리야” 그곳이다. 3년간이나 왔다 갔다 하던 길이다.

 

정지용 길 2: 서울로 통근하던 소사역 길

두 번째 정지용 길은 소사역(지금의 부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 휘문학교까지 통근하던 길이다. 집에서 출발해 소사공소를 지나 부지런히 걸으면 소사역까지 20여분이면 도착한다. 우선 부천혜림학교 앞을 지나 부천시 소사구 경인로 300번길 쯤 와서 소명지하차도 위를 건너면 철둑길과 맞닿은 약간 경사진 길이 나온다. 길을 따라가면 골목이 있다. 옛날에는 논두렁이나 밭두렁, 아니면 산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 보니 길이 막혔다. 다시 뒤로 돌아 국도를 따라 한 2~3분 가다보면 ‘지중해 민물탕’ 식당이 나온다. 그 식당을 끼고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큰 주차장 앞으로 4미터 정도 되는 골목이 보인다.

 
지금은 자유로가 된 그 골목길, 75년 전 정지용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다니던 길이다. 현주소 경인로 90, 77-7, 77번길을 지나다보면 왼쪽으로 하우고개로 넘어가는 골목길도 있다. 걷다보면 여관, 노래방, 마트, 식당 등 각종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옛 명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11월의 바람만 스산하다. 걷다보니 앞이 훤하다. ‘FREE WAY 63‘ 카페가 보인다. 이름이 그럴싸해 보여 주인에게 물어 보니 이곳 주소인 ‘자유로 63번길’을 영어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앞에 소사역이 보인다. 정지용은 기차를 타려고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한참을 기다리다 송내 쪽에서 기적 소리를 울리며 기차가 소사역 플랫폼으로 들어서면 정지용은 기차를 탄다. 창밖에선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기차는 다시 기적소리를 울리며 출발한다.

 
기차가 소사 삼거리를 지날 무렵, 차창 너머로 정지용은 손길이 닿을 듯 말 듯한 집을 바라보진 않았을까? 시간이 지나고 다시 부천으로 돌아오는 길. 어스름한 저녁, 때로는 어느 선술집에 앉아 탁배기 한 잔으로 시를 쓰지 못하는 아픔을 달래거나 하루 빨리 마무리해야 할 성당 건립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이렇듯 정지용은 지금의 부천역, 옛 소사역으로 3년 여간 하루에 두 번은 꼭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곳에 기념이 될 만한 표지판을 붙여야 하는 것 아닐까?

 
“이 길은 1943년부터 1946년까지 약 3년간 정지용 시인이 부천에서 서울로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길입니다” 라고. 얼마나 시적이고 낭만 적인가! 

 
정지용 길 3: 원미산 아래 소사성당 다니던 길

▲ 소사삼거리를 지나 소사성당 가는 길 입구에서 만난 감나무.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 부천시민신문


세 번째 길은 정지용이 살던 소사본동 집에서 경인철길을 건너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489번지, 지금의 소사성당 방향을 기점으로 소명여고가 있는 곳까지 가는 길이다.

 
그 당시는 소명학교가 없었다. 성모병원도, 성가양로원도 없었다. 허허 벌판 원미산 아래 달랑 일본인이 살던 별장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그곳에 성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경인철도가 담으로 막혀있지만 담이 없던 시절, 그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무단으로 철길을 건너 다녔다. 정지용 가족도 모르면 몰라도 무단으로 철길을 건너 원미산 아래 있는 새 성당까지 걸어갔을 것이다. 75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지용이 성당을 다니던 그 좁다란 골목길은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불편을 느끼고 있을지 몰라도, 아직까지 옛길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에 안도했다. 재개발로 와장창 날아갈 뻔했다.

 

▲ 성당 찾아 가는 길     © 부천시민신문


경인 철도를 넘어 남쪽, 부천시 원미로 8번길 27번지를 지나 29-13번지를 끼고 돌아서면 17-2번지 길이 나온다. 몇 발작 걸으면 13-12번지 아래 가파르고 좁은 계단이 나온다. 지금의 소사성당 뒷길이다. 소사성당을 뒤로 하고 이 계단을 따라 오밀조밀 뱀 같은 골목을 돌고 돌아 빠져 나오면 왼쪽으로 소명 사거리가 보인다. 지금이야 번지도 있고, 주소도 있지만 당시는 그저 논과 밭, 언덕과 산이었을 것이다.

▲ 원미로 8번길 부근     © 부천시민신문

 
횡단보도를 무시하고 길을 건너면 오른쪽으로 좀 널찍한 길이 나온다. 좁은 길이 도시계획을 넓어졌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허름한 샛별 식당 간판이 보인다. 그 간판을 옆으로 하고, 또 몇 발작 걸어가면 복개천이 나오고, 그 건너 소명여자중고등학교 정문이 보인다.

 
복개천 건너 학교 담을 끼고 왼쪽 길로 약 50여 미터 올라가다보면 조그마한 친송비 2기가 있다. 그리고 두 갈래의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이 1946년 소사성당으로 들어가는 소림별장 정문이다. 한때는 소명여고 후문이었지만 지금은 학교 건물이 들어서 정문이 사라졌다. 이 문을 통해 정지용이 성당에 드나들었을 것이다.

 
당시는 성당에 가려면 소명여고 앞에서(그때는 없었지만) 개울을 건너야 한다. 지금은 ‘심곡천’이라 부르지만 원래는 ‘소사천’이었다. 아니, 처음에는 그냥 이름 없는 개울이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나오면서 이 개울에서 신자들은 발도 담그고 목도 축였다. 그 때는 그야 말로 청정했다는 이야기다.  

 
후에 이곳에 신자들의 편의를 위해 성당에서 다리를 놓았는데 신자들은 이 다리를 ‘흙다리’라고 불렀다 한다. 언젠가 개울을 덮어 그 모습이 사라졌다.

▲ 원미로 18번길     © 부천시민신문
▲ 골목길     ©부천시민신문
▲ 골목길에서 골목길로 이어지는 길     ©부천시민신문
▲     ©부천시민신문
▲ 골목을 오나전히 벗어나면 조금 넓어진 길에서 만나는 샛별식당     © 부천시민신문
▲ 지나온 골목길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     © 부천시민신문
▲ 샛별식당 앞에서 길을 건너면 소명여중고 앞이다.     © 부천시민신문
▲ 소명여중고 정문에서 죄측으로 올라가서 중간쯤에 소사성당 입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당시의 소사성당은 헐렸다.     © 부천시민신문
▲ 소사삼거리 부근에 위치한 현재의 소사성당 입구 모습     © 부천시민신문

 

사라진 정지용의 흔적들

가끔 충북 옥천에 있는 정지용 문학관에 가보면 해설가들이 부천에서의 행적을 언급하지 않는 걸 목격하게 된다. 한마디로 부천을 무시하는 것이다. 정지용이 부천에 살면서 성당 일에 전념했을 뿐이지 문학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왜 소사본동에서는 정지용이 부천에서 문학 활동을 한 것처럼 오해를 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정지용을 위해 그 흔한 시낭송회, 세미나, 포럼, 심포지엄을 개최한 적도 없다. 부천에는 정지용 문학관도 없다. 옥천처럼 대대적으로 ‘지용제’와 같은 축제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기념사업회도 없다. 연구회도, 문학회도 없다. 단지 있다면 복사골문학회 안에 ‘지용시 동인’이 있을 뿐이다.

 
양경직 선생에 의하면 1946년 정지용이 부천에 살 때 쓴 시 한 펀을 발굴했다고 한다. 이러한 자료를 발굴하는 것이 벽에 시 한 편 거는 것보다 훨씬 정지용을 사랑하고 기리는 것이다. 지금 소사동은 관광사업을 할 것이 아니라 기념비적인 사업을 해야 한다.

 
한마디만 더 하겠다. 정지용은 시인이기 이전에 천주교 신자였다. ‘방지거’ 즉 ‘프란치스코’라는 천주교 이름도 있다. 프란치스코 재속회에 입회할 정도로 독실한 신자였다. 그를 위해 기도를 해본 적이 있는가? 그를 위해 성당에 연미사(죽은 사람을 위해 드리는 미사)를 올려 본 적이 있는가? 그는 분명 시인이기 전에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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