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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골 뜨락에 내린 내 영혼의 별⑥
부천시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가입 2주년 기념 연재Ⅰ 구자룡 편
기사입력  2020/02/10 [13:17] 최종편집    구자룡 시인
구자룡 시인의 저서 행적기 부천시민신문은 부천시가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가입 2주년을 맞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본지 172호부터 관내 문인들의 자서전적 문학이야기를 연재한다. 첫 순서는 본지 편집주간인 구자룡 시인이다. 이번 연재 글은 지난해 10월 16일 부천디카시협회(회장 정 ▲ 구자룡 시인 캐리커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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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룡 시인의 저서 행적기

부천시민신문은 부천시가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가입 2주년을 맞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본지 172호부터 관내 문인들의 자서전적 문학이야기를 연재한다. 첫 순서는 본지 편집주간인 구자룡 시인이다. 이번 연재 글은 지난해 10월 16일 부천디카시협회(회장 정

▲ 구자룡 시인 캐리커처 

창배)에서 강연한 내용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편집자 주>
 
지난 2000년, 30년간 다니던 교직을 명퇴했다. 뭐가 ‘명예’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명예롭게 퇴직을 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머리를 노랗게 염색을 하고 청바지를 입고, 베낭 하나 메고 사방팔방 세상을 누볐다. 이렇게 한 6개월 정처 없이 방황 하던 끝에 한 가지 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엉뚱하게도 유치원이었다. 오늘은 그때 탄생한 저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천사들과 함께 쓴 에세이 <똥 기저귀 빠는 남자> 2006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유치원을 짓고” 철모르는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었다.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평생 교사만 하다가 운영이 힘들 것이라는 관념 때문이었다. 그런 관념 따위는 모두 벗어버리고 2001년 3월, 부천 까치울 언덕에 궁전 같은 집을 짓고 한 어린이집을 개원했다. ‘햇님 나라 구경 간 채송화 어린이집’, 까까머리 학창시절 쓴 동화 제목이 어린이집 이름이 되었다.


어린이집을 개원하고 한 1년쯤 어느 어린이집 전문 잡지사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니 그동안 어린이집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연재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망설임 끝에 허락을 하고 약 3년 동안 쓴 글이 에세이집 <똥 기저귀 빠는 남자>가 되었다. 그 때 만난 천사들과 함께 살면서 일어났던 천방지축 이야기다. 


하루는 어느 젊은 엄마가 세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와서 사정이 어려우니 한 달만  봐달라고 떼를 썼다. ‘3세반’은 없다고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그 엄마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아이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한 달만 봐주기로 했다. 아이는 나와 함께 원장실에서 지냈다. 원장이라 하지만 남자가 어린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밥도 잘 먹고, 간식도 잘 먹고, 다행히 울지도 않고 잘 놀아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똥을 쌀 때였다. 처음에는 다른 반 교사들을 불러 처리하게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자기반 아이들도 돌보기 힘든 형편에 너무 미안한 부탁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이의 똥 기저귀를 내가 직접 치우기로 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어새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솜씨는 능숙하게 숙달되었다. 그러다 보니 똥 기저귀 치우는 일이 귀찮은 것이 아니라 어느 사이 기쁨이 되었다. 한 달 후,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갔다. 그 후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어린이집 아이들이 똥만 쌌다하면 나도 모르게 두 팔을 걷어붙였다는 사실이다.


옛날에는 소위 ‘원복(어린이집 유니폼의 줄임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원복이라는 것이 그렇다. 남들이 보면 참 예쁘고 귀엽다. 그러나 마음껏 자유롭게 노는 아이들에게는 스트레스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집 원복은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였다.


한번은 우리 어린이집에 다니던 설희가 엄마와 함께 목욕탕엘 갔다. 목욕을 끝내고 나오려는데 원복 티셔츠가 없어졌다. 설희는 소리를 쳤다, “독도는 우리 땅! 독도는 우리 땅!!” 무슨 말이냐 하면 그 티셔츠엔 어린이집 이름과 함께 ‘독도는 우리 땅’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설희는 옷을 찾아 달라는 것이었는데 주위 사람들은 어느 어린이집인지 교육을 참 잘 시켰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졸지에 칭찬을 받은, 당시 우리 어린이집 원가가 ‘독도는 우리 땅’이었다.


안타까운 일도 많았다. 명호와 명희는 남매다. 그날도 다른 날과 같이 아침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니 이사를 간 것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어제까지 잘 다니던 아이들이 간밤에 사라졌다. 오죽하면 아이의 원비를 떼먹고 야반도주를 하랴만 그럴 때 마다 씁쓸하다. 종일반에 다니던 두 아이의 원비는 만만치 않았다. 6개월이나 밀렸으니 말이다. 이렇게 못 받은 원비가 아마 당시 집 한 채 값은 되었을 법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여학교의 한 제자가 소문을 듣고 어린이집을 찾아왔다. 중학교 1학년 때 반장을 하던 아이였는데, 그동안 결혼해서 남매를 낳아 그 아이들을 마음 놓고 맡긴다며 데려고 왔다. 세상에…, 엄마와 아이들까지 2대에 걸쳐 가르침을 준 행운(?)이 온 것이다. 친손녀 못지않게 잘 키워서 졸업을 시켰다.


이제 그마저도 은퇴한지 10여년이 넘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꿈같은 일이었다. 지금도 책을 펼쳐보면 나를 미소 짓게 하고, 잠시나마 유토피아 세계를 꿈꾸게 했던 <똥 기저귀 빠는 남자>, 나의 영원한 힘이고 사랑이었다.

 

커튼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 같은 시집 <깊은구지 세탁소> 2009 

1999년 열 아홉 번째 시집 <어머니 얼마나 좋으신지>를 출간하고 10년 만에 스무 번째 시집 <깊은구지 세탁소>는 내 마음의 풍금처럼 안타까움이 너무 많았다. 부천으로 이사 온지 10년쯤 되던 해인 1983년 가을, 부천시 남구 심곡본동 어느 골목에 있는 다쓰러져 가는 한옥으로 이사를 했다.


은행 빛으로 겨우 마련한 집이었는데 비만 오면 천정에서 비가 새고, 겨울엔 우풍이 심해 방에서도 이불을 뒤집어 써야 했다. 그래도 결혼하고 처음 장만한 집이라 온 가족은 쓸고 닦고 온갖 정성을 다해 가꾸었다. 손바닥만 한 마당에 옛날 우리 할머니처럼 철따라 꽃도 심고, 추녀 끝에 멋스러운 풍경도 달았다. 그간 살던 집은 비좁아 다섯 마차 책이 창고에서 잠을 잤었는데, 서재도 그럴듯하게 꾸며 원고지에 시를 쓰는 밤이면 영창映窓으로 새들어오는 별빛, 달빛이 제법 운치가 있었다.


어쩌다 한가한 일요일이 돌아오면 두 아이들을 데리고 성주산 약수터를 오르내리기도 하고 유한양행 산 어디쯤 있다는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가 살았다는 곳도 더듬더듬 찾아가는 문학기행 아닌 문학기행을 하기도 했다. 나름 재미가 쏠쏠했다.


또한 심곡본동이라는 주소는 있었으나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깊은구지’라 불렀다. 그래서 ‘복사골 남쪽 깊은구지 마을 688번지 5호’ 라고 내 집 주소를 스스로 만들었다. 몰론 행정적 주소는 아니었지만 가끔 마음씨 곱고 이해심 많은 우체부 아저씨를 만나면 편지도 곧잘 도착하는 그런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에 장사 없다고 살다보니 한옥은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허물고 새 집을 지었으나 그 집도 세월이 가니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홀연히 떠나고 싶었다. 다시 이사 간 곳은 카드를 대야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현관문이 열리는 새 아파트였지만 환한 미소로 마중 나오는 그리운 사람들이 없었다.

 


 
이 시집을 보고 내가 근무하던 소명여고 30년 동료였고, 말년에 부천대학 강단에서 열강을 하던, 지금은 작고한 문학평론가 유영자 교수는 책 말미에 이렇게 평을 남기셨다.

 

“시인의 시심 온상인 ‘깊은구지’는 현재 소사구 심곡동의 옛 이름이다. 그곳은 오랜 세월 묵은 커튼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 같은 곳, 세월의 저편에서 회고의 장으로 남아 삶이 버거웠을 때면 뒤적여 보아도 그리운 곳일 게다. 그렇게 아이들이 크고, 세상이 변하고, 시인은 새로운 꿈을 꾸는 이즘에 펴낸 스무 번째 시집 <깊은구지 세탁소>는 사랑과 그 사랑의 미완이 시대의 아픈 노여움, 어금니가 주는 고통에도 슬쩍 넘겨 버리는 창조된 곳이기도 하다”라고.


그런데 그렇게 열정적으로 쓰던 시가 요즈음은 샘이 말라버렸는지 또 1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시집 한권을 못 엮고 있다. 그렇다고 그 동안 아무 일도 안한 것은 아닌데 말이다. 이제 등단한지 50년도 넘었고 올해는 꼭 스물한 번째 시집을 상재 보련다. 시인으로 추천해주신 정한모 선생님도 뵐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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