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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골 뜨락에 내린 내 영혼의 별②
부천시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가입 2주년 기념 연재Ⅰ 구자룡 편
기사입력  2019/11/12 [17:34] 최종편집    구자룡 시인
구자룡 시인의 저서 행적기 2    ▲ 구자룡 시인 캐리커처     © 부천시민신문 부천시민신문은 부천시가 ‘유네스코 문학창이도시’ 가입 2주년을 맞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본지 172호부터 관내 문인들의 자서전적 문학이야기를 연재한다. 첫 순서는 본지 편집주간인 구자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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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룡 시인의 저서 행적기 2 

 

▲ 구자룡 시인 캐리커처     © 부천시민신문

부천시민신문은 부천시가 ‘유네스코 문학창이도시’ 가입 2주년을 맞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본지 172호부터 관내 문인들의 자서전적 문학이야기를 연재한다. 첫 순서는 본지 편집주간인 구자룡 시인이다. 이번 연재 글은 지난 10월 16일 부천디카시협회(회장 정창배)에서 강연한 내용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편집자 주>

 

1972년에 부임한 소명학교만 하더라도 그렇다. 서울에서 근무하던 학교보다 한결 정답고 훈훈한 분위기를 풍겼다. 학교 뒷산에 있는 포도밭이며, 포도밭을 돌아서면 온화한 분위기의 시골 성당이며, 아이들과 추억을 쌓기에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번에는 그 교정 30년 추억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무결석반 아이들의 이야기...수필집 <꼴찌들의 합창> (1983)

▲ <꼴찌들의 합창> 표지     © 부천시민신문

1970년대 시골 여학교가 뭐 그리 공부를 잘 했겠는가! 돈 좀 있고,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은 서울 아니면 인천으로 이사를 가거나 전학을 갔다. 그러니 학교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선생님이 오기만 하면 1년은 고사하고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곤 했단다. 그러니 아이들 심정은 오죽했을까?

 
내가 부임할 때도 교장 선생님께서 얼마나 있을 것이냐고 물으시기에 한 3년 있겠다고 하니, 1년만 있으라고 한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갔다. 이렇게 선생님들이 모두 이방인이니, 학교도, 학생도, 모두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한 6개월만 있으려고 했다. 그 6개월이 30년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이들과 지내는 재미가 쏠쏠했다. 내가 담임을 맡은 학급의 아이들은 봄‧가을로 하는 체육대회며, 가장 행렬, 매월 실시하는 환경 심사, 합창대회, 소풍가서 장기자랑 같은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1등만 하는데, 다달이 보는 월말고사를 비롯해 각종 시험에서는 1등을 해본 적이 없다.

 
날마다 꼴찌하기에 바빴다. 교장선생님께 자주 불려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아남았던 것은 교장선생님께서 보시기에 내가 그래도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사랑? 그래도 그때는 그랬다.

 
비 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 또는 낙엽 지는 가을날이면 나는 교과서보다 김소월·윤동주·라이너 마리아 릴케·헤르만 헤세의 시를 낭송해주곤 했다. 가끔씩 문학 이야기도 해주면서 인생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 아이들은 귀를 쫑긋하고 감상에 젖기도 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십대들에게 정서를 심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시대 학교에서는 ‘무결석 반(학급)’이라는 것이 있었다. 보통 한 반에 70명의 학생이 1년 내내 결석은 물론 지각·조퇴를 안 하는 일이다. 요즘 같으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러나 그 당시는 가능한 일이었다. 1학기만 잘 넘기면 나머지는 학생들 스스로 한다.

 
전설의 ‘무결석 반’을 위해 어느 날은 연탄가스를 마시고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아이를 달려가 들쳐 업고 오기도 하고, 병원에 입원한 아이를 몰래 빼돌리기도 하고, 감기·기침 따위는 병도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내가 30년 근무하고 있는 동안 ‘무결석 반’을 3번이나 했으니, 지금 되돌아보면 정신 나간 교사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모든 것을 이겨낼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그런 저런 이야기들을 모아 1983년 출간한 책이 <꼴찌들의 함창>이다. 지금 보면 책 같지도 않은 책이지만 당시에는 문화방송 MBC-TV 어린이 연속 드라마 <호랑이 선생님>의 주간 제목으로 선정돼 제법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특히 가톨릭대(그때는 성심여대) 김봉군 교수께서 당시의 저서 <길을 밝히는 사람들>에 이 글을 수록해주셔서 더 힘이 되기도 했다. 그 외 1984년 열 번째 시집 <겨울 기도>도 출간 했다.

 

부천 최초의 향토 시집이 된 <복사골 우리 동네>(1985)  


어느 날 이름도 생소한 출판사 사장이 또 찾아왔다. 사장이 명함을 내미는데 ‘성황석두루까’ 출판사였다. 역시 천주교회 계통의 출판사였다. 찾아온 사연인 즉, ‘성요셉출판사’에서 발행한 이승훈 전기 <동방의 새 빛>을 잘 읽어보았다며 어디서 그렇게 좋은 자료를 찾아내 이야기를 썼느냐고 하면서 칭찬까지 했다.

 
이야기인즉 좋은 책을 출판할 계획이 있으니 도와달라는 것이다. 무조건 못 쓴다고 했다. 이승훈 전기의 악몽 때문이었다. 사장을 돌려보냈다. 일주일 후 또 찾아왔다. 이런 것을 두고 ‘삼고초려‘라고 하는지 몰라도 하여간 사장은 끈질기게 나를 찾아 왔다.

 
그때 한 가지 제의를 했다. 그동안 써놓은 시가 한 묶음 있는데 우선 그것을 출판해달라고 했다. 사장은 두 말 않고 대답을 했다. 원고를 보내고 한 달여 지나 시집이 나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시집은 비용 절감을 위해 용지를 갱지, 또는 모조지를 사용하는데, 만들어 가지고 온 시집은 표지도 아닌 본문 용지를 눈처럼 하얗다고 해서 스노화이트라고 부르는 최고급 용지를 사용했다. 이런 경우는 보통 책보다 제작비가 두 배 정도 더 든다. 솔직히 좋기는 좋아보였다.

 
책 내용은 이렇다. 내가 근무하던 소명학교는 해마다 봄이 오면 아이들 집을 일일이 찾아가는 소위 ‘가정방문’이라는 이색적인 학교행사가 있었다. 서울서 살던 나에게는 생소했지만 그런대로 흥미가 있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반장이 만들어준 일정표대로 아이들 집을 찾아가는 ‘가정방문’, 그러나 그보다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이들이 사는 동내 이름이었다. 깊은구지, 벌응절리, 진말, 벌막, 하우고개, 구지리, 먹적골 등 생소한 동네 이름들이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정말 신기하도록 재미가 있었다.

 
나는 아이들 집에 들어서자마자 부모님들께 “아이가 공부도 잘 하고 착해요”, “걱정 마세요. 학교에서 잘 지냅니다”라기 보다 동네 유래부터 묻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한 노력으로 잊힐 뻔했던 구전 동요도 발굴했다.

 

샛골 가서 새를 잡아, 장작골 가서 장작 피워 
장말 가서 장을 찍어, 먹적골 가서 먹어보자.

 

여기서 ‘샛골’은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고 ‘사이’의 준말로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정명고등학교 뒤쪽, 인천 장수동으로 넘나들던 산과 산 사이를 말하고. ‘장작골’은 부천시 원미산과 오정구 여월동 사이의 골짜기 이름 ‘장자將者골’이고, ‘장말’은 부천시 원미구 중동 덕수 장씨가 살던 마을로 ‘장말 도당굿’이 유명한 곳이고, ‘먹적골은 부천시 원미구 심곡 3동 부천상공회의소 부근 ‘목자牧者골’이 먹적골로 되었다.

 
재미있는 동네 이름도 있었다. ‘대장리’와 ‘약대리’라는 동네다. 걸어도걸어도 끝이 없는 동네였다. 걸어가면서 아이들에게 묻는다. “대장리는 있는데 왜 ‘졸병리’는 없냐”고. “약대는 있는데 왜 의대는 없느냐?고.” 이렇게 1972년부터 10년이란 세월을 부천 구석구석을 여행 아닌 여행을 다니다 보니 부천의 향토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틈틈이 기록해 놓은 것이 ‘시로 쓴 부천’이라는 부제가 달린 <복사골 우리 동네>이다. 시집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 부천시 이해제 시장님을 찾아 갔더니 부천의 이야기를 시로 써 주어서 고맙다며 금일봉과 함께 ‘나의 자랑 부천시, 나의 고향 복사골’이라는 휘호를 1장 써주어 책 속 표지에 넣었다. 지금 보면 내용이 좀 어설픈 것 같지만, 그래도 이 시집은 부천 최초의 향토 시집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동화로 쓴 가톨릭 성녀전 <작은 꽃 데레사>, <젬마 갈가니>, <엘리사벳>과 함께 산문집 <머물다 갈 뿐이지만>도 출간했다.

 
그리고 1986년에는 어린이를 위한 동시집 <빨간 뾰죽 집>, 1987년에는 역시 천주교 성녀전 <모니카>, <프란치스카>, <마리아 고레띠>와 그동안 발표했던 원고를 모아 동화 <아빠의 훈장>도 출간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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