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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창간 10주년 기획특집 르포
부천 바람길에서 부르는 대장동 아리랑
기사입력  2019/07/15 [01:07] 최종편집    글- 구자룡 편집주간, 답사 지원-양경직(향토사학자), 사진-나정숙 기자
▲ 대장동 탐사-좌로부터 나정숙 기자, 구자룡 편집주간, 양경직 향토사학자     © 부천시민신문


지난 5월 7일 국토교통부는 수도권 주택 30만호 공급 안(案)으로 ‘제3기 신도시’ 추가 조성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 부천시 대장동, 오정동, 원종동 일원의 땅 343만㎡(104만평)가 포함돼 주택 2만여 가구를 건설, 인구 4만7천여 명이 부천시로 유입될 전망이다. 그동안 말도 많고 탈고 많던 대장동 개발을 정부가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부천시민신문은 창간 10주년 기념으로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를 부천의 바람길, 대장동 마을을 답사하여 르포로 싣는다. 답사와 기록에 도움을 주신 양경직 향토사학자에게 감사드린다. (편집자 주)

▲ 대장동 입구에 들어서자 마주하는 현수막     © 부천시민신문

 

45년 전 그 아이를 찾아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서울서 살다 책 다섯 마차를 끌고 소사, 지금의 부천으로 이사를 왔다. 소명여고에 국어교사로 부임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필자의 부천 삶은 시작되었다.

 
소명여고에서는 복사꽃 지천으로 피는 봄이 오면 연중행사를 한다. 아이들의 집을 일일이 돌아다니는 일명 ‘가정방문’이었다. 택시는커녕 버스도 제대로 없었던 시절, 걸어서 70여 명의 아이들 집을 방문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 중에 한 아이가 오정면 대장리 어디쯤에 살았다.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던 대장리 가는 길은 험준했지만 그 아이의 부모님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는 발길은 가벼웠다. 오랜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지금, 난 그 아이를 기억하며 대장동으로 가고 있다.

 
부천역 남부광장에서 출발하여 괴안동사거리를 지나가는 12-1번 버스를 탔다. 중동역, 송내역, 부천시청역 등 전철역이란 역을 다 지나 도당사거리, 오정동 휴먼시아 아파트를 지나 부천 시내를 돌고 돌아 1시간 10여 분만에 대장동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대장동은 옛 대장1리인 큰말과 옛 대장2리인 섬말을 합해 약 300여 세대에 인구 600여 명 남짓 살고 있다. 부천시내 다른 동네에 비하면 작은 마을이다. 대장1리에는 반남 박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고, 대장2리에는 해주 오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리고 타성들이 살고 있다.

 
한편에서는 대장동을 ‘도시 속의 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허허벌판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니 멀리서 보면 바다에 떠 있는 섬처럼 보였을 것이다. 도시 속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 대장교 난간에 “부천 대장신도시가 경기도의 심장으로, 수도권의 눈으로 각광받는다. -부천 대장 안지구 도시개발추진위원회-” 현수막이 도심(都心)을 타고 온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펄럭이고 있다. 여기서 ‘안지구’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말함이다. 공인중개사 사무실 문짝에는 ‘기자 출입금지’가 붙어 있다. 얼마나 기자들이 귀찮게 했으면 저런 현수막이 붙었을까 스스로 반성하면서 마을 입구 다리를 건넜다.

▲ 부천의 '세느강변'에 위치한  세느강변 가든  식당     © 부천시민신문

 
다리를 건너니 재미있는 식당 간판이 눈에 띠었다. ‘세느강변 가든’이다. 뜬금없이 이런 시골 마을에 무슨 세느강변? 여기에는 웃지 못할 사연, 깊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990년대 아시아나항공 승무원들이 이 허름한 선술집(식당)을 발견하고 이곳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식당 옆에 마침 속칭 ‘대보둑’이라 부르는 동부간선수로가 흐르고 있었는데 이 수로를 프랑스 ‘세느강’에 비견해 이름을 지었다. 자연이 식당 이름이 ‘세느강변 가든’이라 불렸는데, 몇 해 전 식당 주인은 아예 가게 이름을 ‘세느강변 가든’이라고 간판을 바꿔 달았다. 지금은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식당이 되었다.  

 
몇 발자국을 더 가니 202-5번지에 팽오리농장으로 쓰는 대장정미소가 골동품처럼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정미소에는 사연이 많다. 1950년대 초에는 최광훈 씨가 운영하다가 나중에 표순조 씨로 바뀌었고, 다시 전상태 씨와 박휘양 씨가 공동 운영하다가 이후 전상태 씨가 혼자서 1989년 무렵까지 운영했다고 한다. 1950년대 말, 대장리에서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온 곳이 바로 대장정미소이다. 그 덕분에 경기도에서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좋은 시설을 갖추고 하루에 200가마 이상 벼를 도정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교사 1명, 학생 2명의 대장 분교  

▲ 울창한 들메나무 그늘, 그리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빈 운동장만 지키고 서있다.     © 부천시민신문


방앗간 뒤로 돌아서니 대장동 196번지, 울창한 숲속에 덕산초등학교 대장분교가 자리하고 있다. 1954년 개교한 이 학교는 처음부터 분교가 아닌 대장국민학교였다. 대장리를 비롯하여 인근의 오정리, 과해리(노루메), 오곡리(안말), 오쇠리에서 이곳까지 다닐 정도로 학생 수가 많았다. 학생 수가 너무 많아지면서 일부 학생들이 오정동에 있는 덕산국민학교(현 덕산초등학교)로 분교(分敎)를 하였다. 그러나 대장동이 그린벨트로 묶이고 세월이 흐르면서 학생 수가 줄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거꾸로 덕산초등학교 대장분교가 되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2019년도 현재 3학년 1명, 5학년 1명, 딱 2명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 

▲ 대장동 마을회관. 어린이집에는 원아가 40명이다.     © 부천시민신문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곳 마을회관 내 어린이집은 이용자가 무려 40명이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입학할 무렵에는 모두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굳이 말 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 마을이 신도시로 개발되면 학생 수가 늘어나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대장분교 운동장에는 오늘도 더 이상 한글을 가르칠 학생이 없는 세종대왕과 지켜줄 학생이 없는 이순신 장군이 넓은 운동장을 고즈넉하게 바라보고 서있다. 몇 십 년은 족히 자랐을 교문 옆 들메나무 사이로 긴 적막을 뚫고 ‘휘이잉’ 바람이 소리 내어 말을 건넨다.

 
덕산초등학교 대장분교를 지나 마을 입구 대보둑(동부간선수로)에 놓인 다리를 건너자 바로 오른편에 대장1리 4-H 표지석이 길가에 방치되어 있다. 표지석 상단에는 대장1리라고 명기돼 있고 하단에는 색칠한 네잎클로버가 박혀있다. 토박이 박찬홍(67, 남) 씨에 의하면 14~15살 무렵 마을 청년 박애서·박충서·박상렬 씨 등이 세웠다고 한다.

 
현재 80대 되는 분들이 1세대이고, 박찬흥 씨 등이 2세대로 활동을 했다. 대장1리 4-H는 큰말 청년들, 대우 4-H는 대장2리 섬말 청년들, 그리고 한다리 4-H는 대장3리 한다리에 가주하던 청년들이 활동한 단체였다. 글자는 박충서 씨가 새겼다. 

 
4-H의 의미는 ‘Head(智)·Heart(德)·Hand(勞)·Health(體)’에서 각각 머리글자 ‘H’자를 딴 것이다. 당시 대장리 청년들은 풀베기(퇴비 증산)뿐 아니라 경기도4-H경진대회에 출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작은 다리 하나를 또 건너니 이번에는 폐허가 된 교회 건물이 보인다. 대장동 183-4번지. 바로 박태선 장로가 이끌던 소사 신앙촌 천부교 산하의 대장전도관이다. 유명한 소사신앙촌은 범박동에 있었지만 대장동에도 전도관을 두었다. 신앙촌에서 생산한 물품 가운데 간장 등이 유명했다. 이곳에서는 신도들이 밍크담요 등을 팔아 제법 번잡스러웠다고 한다. 현재는 가구공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장동,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 

▲ 주택에 둘러싸여 가지도 제대로 뻗지못한 수령 400년 된 들메나무가 생명문화재로 보호받지 못한 채 푸른 위용을 위태롭게 뽐내고 있다.     © 부천시민신문

다시 마을 한 가운데로 나아가 대장교를 건너니 곧바로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 오른쪽 언덕배기에 허름한 집 한 채가 보인다. 바로 일제시대 때 강습소 자리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학교나 다름없는 곳이다. 일본인 교사가 파견돼 주로 일본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 마을에 사는 박휘양(86) 씨에 의하면 인근의 오정리, 원종리, 오쇠리, 오곡리, 과해리 마을의 아이들이 이 강습소를 다녔다고 한다.

 
박휘양 씨는 이곳 강습소에 1년을 다니다가 오정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시험 문제가 비행기나 배 그림을 보여주고 알아맞히기이었다고 한다. 박 씨는 단박에 정답을 말해 합격을 하였지만 대답을 못해 불합격한 아이들도 있었다며 웃었다. 아무리 시골이라 하더라도 설마, 배, 비행기를 모르겠느냐고 하겠지만 당시 교육문화 환경으로 미뤄볼 때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강습소를 지나 언덕배기 중앙에는 수령 300여년을 자랑하는 도당할아버지 나무인 들메나무가 우뚝 서 있다. 도당할머니 나무였던 향나무는 예전에 죽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아래서 한때는(1980년대 초반까지)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도당제를 지냈다. 이런 연유로 이 산 이름이 도당재(禱堂峴)이다.

 
처음엔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몰랐다. 그러다 지난 2015년 양경직 부천향토문화연구소 수석 연구위원이 식물학자 오병훈 한국수생식물연구소 대표에게 요청해 확인한 결과 들메나무로 밝혀졌다. 오병훈 대표는 “이렇게 큰 들메나무가 마을에 있다는 게 신기하다”면서 문화재로 신청할 것을 권하면서 <부천시 오정구 대장동 두 그루의 들메나무 노거수에 대한 소견>까지 보내왔지만 부천시는 지금까지 묵묵부답이다. 수령 300~400년 된 들메나무가 생명문화재로 보호받지 못하고 민가에 끼인 채 제대로 관리조차 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정말로 안타까웠다. 저러다 또 개발붐에 밀려 무모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하루 빨리 대장동 들메나무에 대한 보호 대책이 마련되기를 부천시 관련기관에 촉구해본다.

 
이런 여건 속에서도 반가운 곳이 있다. 대장동 6통 새마을지도자 박찬흥 씨 집 앞에 있는 ‘친환경 벼농사체험장’이다. 부인 강영진 여사와 함께 운영하고 있는 이곳은 벼농사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체험학습장으로 인기가 높다. 매년 5월이면 이곳에서 손모내기 체험행사를 마련,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신나게 흙탕물 속을 달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내기를 하던 아이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올해부터 이 행사가 상동으로 옮겨져 아쉽다. 요즘도 도시 아이들이 체험을 하러 오기는 하지만 옛날 같지는 않다고 한다. 박찬흥 씨는 대장동 6통 새마을지도자로 올해 31년째 활동하고 있다. 2017년 대통령표창을 받을 정도로 대장동 마을을 위해 헌신해왔다.    

▲ 박찬흥 씨 댁의 연자방아돌. 하나는 텃밭에, 하나는 수돗가의 팔래판이 되었다.     © 부천시민신문


체험장을 돌아 나오니 텃밭에 연자방아가 보인다. 이 연자방아는 대장리에 3개가 있었다. 하나는 대장1리에, 또 하나는 박승수 씨 집에, 그리고 박찬흥 씨 집에 있다. 대장2리 섬말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던 것은 대장동 복지회관 자리로 옮겨졌다.

 
이후 섬말 연자방아간이 없어진 뒤 대동우물 옆에 방치되어 있다가 이 우물을 메우고 난 이후 우물 옆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흩어져 있는 연자방아를 보니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이 역시 사라지기 전에 박물관에 갖다놓고 보관이라도 해야 할텐데….

▲ 지금은 사라진 대장동 빨래터 모습과 연자방아돌.     © 양경직 자료사진

 
오래 전부터 부천시는 박물관이 많은 도시라고 홍보를 해왔다. 그러나 정작 ‘문화도시 부천’에 향토사박물관 또는 부천시역사박물관이 없다. 아무리 박물관이 많으면 무엇하랴? 자신의 뿌리조차 정리되어 보존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라니…. 선사 유적지 발굴로 드러난 부천의 오랜 역사와 유물이 제대로 관리되고 보존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져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천시향토사박물관(또는 역사박물관) 건립이 시급하다

 

문화시설이 하나도 없는 동네

▲ 건축연대를 알수 없는, 아직도 건재한 일본식 2층 가옥     © 부천시민신문


계속해서 걷다보니 특이한 건조물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동네에선 유일한 2층집인 이곳은  발코니 같은 다락과 정원의 모습이 언뜻 보아도 일본풍이 느껴진다. 솟아오르는 궁금증을 이기 못해 어렵게 집주인의 양해를 구해 살펴보았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예상대로 전형적인 일본식 다다미 집이었다.

 
집주인에 따르면, 원래 주인은 일제 식민지시대 때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지식인의 집으로 50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한 번도 고친 적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 내부 구조는 다다미방 그대로 초기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거주자들의 불편함에 위로를 보내면서 지역 향토사 연구와 조사가 더욱 절실함을 느꼈다.         

그런데 동네 한 바퀴를 돌다보니 가슴 아픈 일이 있다. 문화시설이 하나도 안 보인다. 이발소, 목욕탕, 미장원, 문방구, 슈퍼, 노래방, 학원, 등등 문화시설을 눈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 동네다. 밥을 파는 식당이 달랑 2곳,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럴 수가 있을까?

 
목욕을 하고 싶어도, 머리를 깎고 싶어도, 그 흔한 볼펜 하나 사고 싶어도 차를 타고 멀리 나가야 하니, 그동안 사는 것이 얼마나 불편했으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해가 긴 여름은 그래도 다행이다. 해가 짧은 겨울이면 그 불편함은 더하다. 겨울바람이 사정없이 불고, 눈보라가 치면 대장동 사람들은 꼼짝도 못 한다. 시베리아 벌판이 따로 없다.

 
가게라고는 오로지 박휘양 어르신 집, 기둥에 ‘담배표’ 딱지 간판을 걸어 놓은 1평 남짓 구멍가게가 전부이다. 그 간판을 내 건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는 대장동에서 유일한 이 가게에서 ‘아이스케키’를 사먹으며 잠시 쉬었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 부천의 세느강으로 불리는 동부간선수로     © 부천시민신문


풍경으로 보면 이곳은 1970년대 쯤에서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다. 김포공항 때문에 주변 환경으로 인한 개발제한구역의 멍에를 안고 사는 주민들로서는 수 십 년 켜켜이 쌓인 불만이자 아픔이요 고통일 것이다. 나직한 기와집과 양철지붕 그리고 허름한 집들에서 마을 사람들의 불편함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갑자기 숙연해진다. 그렇다면 이 마을 사람들은 그동안 어찌 살았을까? 집을 수리할 수도 없는 ‘개발제한구역’,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쌓이는 대로 살아야 했다. 주민들이 숨을 쉬며 먹고 살 수 있는 대책이 있었어야 하는데, 부천시는 지금까지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었단 말인가? 동네 진입로 하나 만드는데도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런 대장동이 지난 5월, 3기 신도시로 선정되었다. 100만평 대장동을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은 20여년 넘게 정치인·상공인들에 의해 제기돼왔다. 이런 개발 붐을 타고 이미 몇 년 전부터 이곳은 달라지고 있었다. 모내기가 한창이어야 할, 지금도 너른 들판은 객토를 하느라 뿌연 흙바람 속에서 몸살을 겪고 있다.

▲ 개발 공사 모습     © 부천시민신문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멀지 않아 상전벽해(桑田碧海) 즉,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의 풍경이 모두 사라질지도 모를 경기도 부천시 대장동 마을, 오늘 따라 6월의 햇살이 유난히 따갑다.

 
희미한 기억 속, 45년 전 대장동에 살았던 그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학교를 다녀준 그 아이, 바람 지나가는 저 골목에 있을까? 아니면, 햇살 빛나는 저 언덕에 있을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대장동의 변천

▲ 멀리서 바라보면 한가롭기만 한 대장동 마을 전경     © 부천시민신문

 

대장동은 경기도 부천시 오정동행정복지센터에 속한 동으로 조선시대 부평군 주화곶면의 대장리 지역으로 1914년 부천군 오정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부천군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김포군 오정면 대장리가 되었다가 1975년 김포군 오정면이 부천시로 편입되면서 다시  대장동으로 개칭되었다. 1988년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에 편입되었다가 1993년 중동 신시가지 개발에 따른 인구 증가로 분구돼 오정구에 편입되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오정동에서 관할한다.

 
대장동은 풍수지리적으로 우뚝 선 사람이 태어나는 지형으로, ‘우뚝 선 사람’이란 곧 '대장(大將)'을 뜻한다고 풀이하여 '대장(大壯)'으로 표기하였다고 전한다. 자연마을에 섬말·큰말·한다리 등이 있고, 뒷마루들·돌다리들·흙다리들 등의 들녘이 있다. 섬말은 마을이 논으로 둘러싸여 붙여진 이름이며, 한다리는 굴포천을 건너는 돌다리인 한다리[大橋] 주변의 마을이다. 조선시대 때 부평도호부(지금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로 가려면 이곳을 지났다고 한다.

▲ 유유히 흐르는 동부간선수로     © 부천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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