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시론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홍난파 작곡 <고향의 봄>이 부천 이미지라고?”
‘부끄러운’ 3.1 운동 100주년...시청에 ‘친일작가’ 노래비 버젓이
기사입력  2019/04/15 [08:54] 최종편집    구자룡 편집주간·시인

상동 ‘친일 시비’ 철거와 대조...‘역사 의식’ 없는 공무원들 ‘비난’ 

 

▲ 구자룡 편집주간·시인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부천시는 상동에 있는 ‘시와 꽃이 있는 거리’에 조성됐던 친일시인 서정주·노천명·주요한의 시비를 철거했다.

 
또한 지난 3월 15일에는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선정 기념으로 개최 부천시립예술단에서 마련한 신춘음악회 한국가곡 ‘봄을 노래하다’에 친일파 음악인들이 9명이나 된다는 본지(NEW부천시민신문 159호)의 보도로 행사를 앞두고 급하게 프로그램을 변경하는 헤프닝을 벌였다.

 
그런데도 부천시청에는 아직도 친일 흔적이 남아 있어 공직자들의 민감성이 부족한  역사 인식에 아쉬움을 남긴다.

 
신성한 부천시의회 앞 작은 정원에 친일 아동문학가 이원수가 작사하고 역시 친일 작곡가 홍난파가 작곡한 <고향의 봄> 시비가 서있다.

 
시비 뒷면을 보면 “노랫말이 우리 시(市)의 이미지와 부합되고 옛 소사 복숭아의 향수를 되새기고자 이 비를 세웁니다. 2001. 5. 부천시”라고 적혀있다. 연도로 보아 원혜영 시장 재임기간에 해당된다. 

 
대한민국에서 성장한 40대 이상이라면 아마 <고향의 봄>을 들을 때마다 아련한 유년시절을 정겹게 떠올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노래를 작사한 이원수는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친일 부역자다. 그의 노랫말에 곡을 붙인 작곡가 홍난파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은 식민지 시절 친일 부역이 예술의 전 영역에서 일관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때부터 이원수는 일본 식민지 체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1942년 8월 <반도의 빛>에 발표된 동시 ‘낙하산-방공비행대회에서’와 ‘지원병(志願兵)을 보내며’에서는 ‘용감한 낙하산 병정’을 찬양하고 병역 봉공의 의지를 노래했다.

 
동시는 아이들을 상대로 쓰는 시다. 그러나 이원수는 황국신민을 만들기 위한 내선일체의 논리를 동시라는 장르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어린이에게 그림자처럼 다가갔다. 아직 민족적 정체성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이들에게 씩씩한 일본 병정, 지원병 형님 이야기는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1943년 1월 <반도의 빛>에 발표된 산문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더욱 잘 드러난다. 그는 반도의 아동은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기 위해 “강제 받지 않고서 일본정신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문필 보국은 비단 동시에 그치지 않았다. <반도의 빛> 1943년 5월호에 발표된 권두시 ‘보리밭에서-젊은 농부의 노래’는 전시 체제 하의 농민이 총후봉공(銃後奉公)에 임하는 자세를 노래했다.

 
그는 이 시에서 풍작을 기원하는 농부의 소망은 곧 전쟁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것이며, 젊은 농부들은 “승리를 위해 피 흘리는 일선의 장병”과 같은 ‘생산의 전사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원수는 일제가 추진한 민족말살정책의 일부인 내선일체 사업에도 적극 화답했다. 일제는 고대 일본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며,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에 신도(神都)를 세운다는 계획 아래 신사를 짓는 공사를 벌였다.

 
이원수는 신궁조성사업에 참여하여 비로소 ‘황국신민이 된 우리’의 사명은 “태평양이라도 한숨에 건너가서 못된 무리들을 처부수고 참된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대동아전쟁 하에 우리들의 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했다.

 
<고향의 봄>만큼이나 널리 불리는 노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지원병을 보내며>에서 “우리도 자라서” “굳센 일본 병정이 되겠다”고 노래한 이원수를 볼 때 불편하고 씁쓸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노래를 작곡한 홍난파는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는 가사의 가곡 <봉숭아>로도 유명하다. “담 밑에 저만치 외롭게 피어 있는 꽃은 우리 조선을 뜻하는 것이고, 일제하 조국의 비운을 상징한다”고 학창시절 음악선생님은 그렇게 설명해주셨다.

 

그래서 필자는 한때 홍난파가 ‘민족적 수절을 지킨 민족음악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홍난파 역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하의 민족 현실과는 무관한 친일 음악가였다.

 

일제는 3·1 운동 후 내세운 이른바 ‘문화정치’를 통해 ‘민족음악개량운동’을 펼치기 시작하는데, 1937년 7월 이후 홍난파가 펼쳐온 ‘민족음악개량운동’은 바로 ‘친일음악운동’이었다. 1937년 9월 15일 조선총독부와 조선문예회가 “시국 인식을 철저히 하며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시국 가요 발표회’를 이왕직 아악부에서 개최하자 홍난파는 최남선이 작사한 <정의의 개가凱歌>와 <장성長城의 파수把守>, 일본인 채본장부 彩本長夫가 작사한 <공군의 노래>라는 친일가요를 발표하였다.또한 일제 때 소위 ‘국민가요’라고 불렀던 <애국행진곡>, <애마진군가]>, <태평양 행진곡>, <흥아 행진곡>, <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 등을 작곡했는데, 그 노래 내용은 어김없이 “천황폐하 중심의 일본 정신과 정서”를 드러내고 있는 반민족적인 노래들이었다.

 

홍난파는 앞장서 창씨개명에 동조하였고, 모리가와준(森川潤)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41년 1월 25일에는 조선 최대의 친일음악단체인 조선음악협회(회장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와라 濫原時三郞)의 조선음악인 평의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평의원은 모두 23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조선인은 7명밖에 되지 않았다.

 
부천이 시로 승격된 지 올해로 46년이 지나고 있지만 신성해야 할 부천시의회  앞 정원에 친일 노래비가 20년 가까이 방치 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광복 74년을 맞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청산하지 못한 ‘친일’ 흔적으로 갈등을 빚고 있다. 비단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동안 명확한 ‘시대 인식’을 하지 못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늦었지만 부천시의회 앞 정원에 있는 <고향의 봄> 시비는 하루 빨리 철거하여 3.1운동 100주년을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 시의회 청사 앞에 세워진 고향의봄 노래비 앞면과 뒷면     © 부천시민신문

 

 

 

 

 

부천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구자룡, 이원수, 홍난파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