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시 승격 50주년 기념 연재(6) 무용가 박효순‘부천이 낳은’ 한국무용가 박효순의 춤 인생 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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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새를 보고 무용가를 꿈꾸다
‘부천이 낳은’ 한국무용가 박효순! 그녀의 이름 앞에 감히 ‘부천이 낳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본다. 1949년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6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춤꾼’으로 반세기 이상을 살았으니 지나친 미화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박효순의 집안은 7대를 부천에서 살아온 토박이이다. 일제 식민지를 막 벗어난 혼란기에 태어난 그녀가 ‘무용’이란 단어조차 희소했던 시기에 무용가의 꿈을 키운 것은 6세부터라고 한다. 하루는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 순간, 그 몸짓이 너무 아름다워 자신도 새처럼 날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무용가를 꿈꾸며 살았다.
어린 소녀 박효순은 그날부터 아름다움을 몸으로 표현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상상력에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허구 한 날 날개짓을 하며 바람개비처럼 뛰어다니던 그녀는 기어이 춤을 추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장벽이 너무 많았다. 그 당시는 더욱이 무용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을 때라 부모님은 물론 집안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하는 수 없이 가슴 속에만 꿈을 간직한 채 부천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가톨릭계 학교인 소명여자중학교에 진학해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갔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가끔 수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명여중은 신성우 신부가 세운 학교로 수녀들이 교사로 재직해 아마도 그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교정에서 권영창 수녀(당시 교장)와 마주쳤다. 순간 박효순은 교장수녀는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것만 같은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무용가가 되고 싶다고 간절하게 고백을 하고 말았다.
“수녀님, 꿈이 무용가가 되는 건데요 어찌 하면 좋을까요? 식구들이 모두 반대해요”
“효순아, 그러지 말고 수녀가 되는 게 어떠니?”
“수녀님, 저는요, 수녀보다 무용가가 더 되고 싶어요. 수녀는 나중에 할게요.”
“그래? 그럼 네가 무용가가 되는 데 내가 도와줄게.”
박효순은 뜻하지 않게 만난 교장 수녀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교장 수녀도 뜻밖이었지만 한 학생이 무용가가 되고 싶다고 전한 간절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꿈을 밀어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렇게 꿈을 안고 학업과 무용을 병행해 가며 춤추는 일에 열중했다.
어느덧 박효순은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하루는 교장 수녀가 박효순을 불렀다. 가을에 읍내에 있는 소사극장에서 학교 학예회를 하는데 그때 무용 발표를 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뜻밖의 소식에 그녀의 꿈은 더욱 영글어갔다. 박효순은 가슴이 벅찼다. 꿈에 그리던 공연을 무대에서 할 수 있게 된 것이 되어 무엇보다 기뻤다. 그리고 밤을 새워가며, 피나는 연습을 했다.
'여고생 박효순'의 첫 무대 공연
1965년 가을, 드디어 소사읍의 유일한 소사극장에서 소명여고 학예회가 개최돼 박효순이 첫 무대에 서는 날이 왔다. 평소 반대했던 가족들도 모두 모였다. 아니 소명여자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소사읍 내 사람들이 소사극장을 가득 메웠다. 무용, 어쩌면 문화가 열악한 부천 소사 사람들로서는 신기하고도 궁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효순은 온 동네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다. 그리고 그 힘으로 KBS 주최 전국학생무용대회에 참가해 최우수상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각종 대회마다 트로피를 거머쥐며 무용가로서의 꿈을 다져갔다. 하지만 아무리 춤을 잘 춘다해도 무용가의 꿈을 키우기엔 빈농의 딸로서는 무리였다. 그래도 꿈을 접을 수가 없었다.
소명여고를 졸업한 박효순은 망설일 것도 없이 이화여대 무용과에 입학원서를 넣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험 보는 날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1차를 포기하고, 당시 후기로 시험을 치렀던 서라벌예술대학교(현 중앙대학교) 무용학과에 합격해 본격적으로 무용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대학생이 된 박효순은 학문과 무대 경험을 쌓기 위해 타 대학에 재직하던 한국무용계의 거장인 김백봉 선생을 비롯해 박금술 무용가를 찾아다니며 사사를 받고 그들이 공연을 빠짐없이 보면서 배워나갔다. 이러한 노력으로 전국무용 콩쿨에서 신인상을 받으면서 비로소 무용가로 정식 데뷔하였다. 얼마 뒤 열린 전국민속무용대회에서는 대통령상을 거머쥐며, 무용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를 계기로 그의 스승과 선배들로 구성된 해외공연단에 합류해 미국, 유럽, 일본 등지의 순회공연에 참여하였다. 당시의 공연으로 한국무용은 전세계에서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입증하는 한편 명성을 떨쳤고, 박효순 역시 그에 일조하였다.
명성을 쌓은 박효순은 고향 소사로 금의환향(錦衣還鄕)했다. 그러나 여전히 인구 3만여 명 밖에 안 되던 ‘소사’는 여전히 ‘농촌’사회였고, 낙후된 ‘시골’이었기에 무용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여전히 반대에 부딪혀야만 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어머니는 다른 가족과 달리 박효순이 무용가가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때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눈물
박효순은 어머니만 믿고 어떠한 곤경과 고통이라도 춤사위에 날려버릴 수 있으리라 마음먹고 작품으로 관객몰이를 했다. 그녀는 무대만 있으면 공연을 했다. 이러한 명성으로 박효순은 1965년 창립된 부천문화원의 최연소 이사로 위촉을 받았다. 그녀의 나이 스무살이었다.
이렇게 실력을 쌓은 박효순은 1970년 경 모교 소명여고에서 무용교사로 재직하면서 후배 양성에 앞장섰다. 학창시절 꿈을 키워준 모교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1971년, 23살의 나이에 그의 꿈인 무용학원을 부천에 설립했다. 박효순 무용학원은, 부천 관내 학원 제1호이면서 무용학원 1호이었다.
무용학원 설립 과정의 일화 한가지를 소개한다. 박효순이 무용학원 허가를 받으려고 경기도교육청을 찾아갔다. 당시 학원 인가 업무는 부천이 아닌 인천에서 했다. 담당자는 “무용학원은 안 된다”며 인가를 해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춤’ 학원은 “퇴폐적이라서 인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박효순은 어이가 없었다.
물론 ‘무용’이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표현하면 ‘춤’이다. 그러나 춤은 대중적이요, 무용이라 함은 예술적이라는 것을 당시 교육청 직원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박효순이 누구인가? 그냥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석 달 열흘, 인천을 드나들면서 교육청 직원을 끈질기게 설득해 비로소 부천 최초의 무용학원 허가를 받아냈다.
그러나 시련이 닥쳐왔다. 학원의 문은 열었으나 수강생이 오지를 않았다. 시대가 시대이고 모든 것이 열악한 시골에서 무용학원은 이해 부족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무용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외계층의 사람들을 위해 고아원, 양로원, 국군장병 등을 상대로 위문공연을 시작하기도 했다. 정말 많은 고생을 하며 무용 저변확대를 위해 힘을 썼다.
그의 화려한 공연 작품을 일일이 거론하기는 좀 벅차지만 1987년 부천시민의 숙원인 부천시민회관이 개관하였다. 그것을 기념하고자 1988년 〈복사골의 서정〉, 1989년 〈사랑은 연꽃이 되어〉 등 창작 무용을 선보여 화려하고 아름다운, 진정한 한국무용의 극치를 시민들의 가슴속에 각인시켜 주었다. 박효순은 주로 고향 부천의 정서를 담은 내용으로 공연 계획을 했다. 1989년 <인생 무정 고향 무정>, 1990년 <밝아오는 우리 마을> 등이 모두 당시의 작품이다.
민족의 혼 담은 <아리랑 혼>을 무대에 올리다
특히 1990년 광복 45주년 부천시민회관 공연장에서 기념으로 공연한 <아리랑 혼〉이 있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춤사위만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애환을 간직한 숨결과 맥박소리였다, 우리 조상의 근본정신인 은근과 끈기를 가장 잘 보여준 한국무용의 진수였다고 서울의 중앙 매스컴들이 앞다퉈 보도했다.
다양한 작품과 화려한 춤사위로 서민의 삶을 달래며 꿈과 영혼을 어루만져 준 그녀의 행보는 멈출 새가 없었다. 그녀의 화려한 공연에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필자 역시 공연이 있을 때마다 처음 기획부터 연출까지 다방면에서 도움을 주었다. 사진작가 김수열, 김수근 등은 공연 뿐 아니라 다양한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박효순은 지역주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매달렸다. 지역 예술가들을 위해 1987년 부천무용협회를 창립했다. 1995년에는 부천 최초의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제5대 부천예총 지부장 선거에 나서 당당히 당선되었다. 지부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부천의 예술인 저변확대와 질적 향상에 앞장섰고, 향토 예술인들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평소 “생활이 무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던 그녀는 아름다운 춤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그러나 보여주기식 ‘춤’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진솔하게 표현한 춤으로 더 각광을 받았고, 그것이 박효순의 춤이었다.
이러한 노력들로 박효순은 1985년 한국무용협회가 주최한 00000에서 안무지도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1989년 제7회 부천시문화상, 1991년 경기도여성상, 1992년 경기도 예술대상 등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죽는 날까지 부천을 사랑하며 부천의 무용가로 남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겠다”던 그녀가 얻은 값진 대가(代價)이다.
주요 공연 작품
1992년 ‘춤의 해’ 기념 공연 <창살에 비친 한>과 <님이시여, 님이시여>, <하늘 잃은 땅>(제1회 전국 지방무용제 안무상 수상), <문풍지> <귀로>(1993년 제2회 전국 지방무용제 미술상 수상), 1994년 <삶과 죽음의 길이 예 있음에>(제3회 전국지방 무용제 미술상 수상), 1995년 제4회 전국 지방무용제에서 <영상에 비친 사의 자애>로 최우수상·연기상·의상상 등 3관왕 차지.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 <고향> 등.
에필로그
지금 그녀는 ‘박효순 무용 70년’을 정리하는 화보집 발행을 준비 중이다. 그동안 발표한 공연 작품들이 100여 권의 앨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올해가 부천시 시 승격 50주년이기에 기념공연을 하고 싶었지만, 흐르는 세월은 막을 수가 없어 한 권의 책으로 남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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