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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보다(2)

해상왕 장보고와 법화원

부천시민신문 | 기사입력 2009/02/19 [09:00]

대륙을 보다(2)

해상왕 장보고와 법화원

부천시민신문 | 입력 : 2009/02/19 [09:00]
지난 1월 딸과 함께 중국에 다녀왔다. 일전에 한번 다녀온 곳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나 지정학 상으로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중국에 대한 호기심을 단 며칠의 짧은 시간에 해소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리한 일이었다.

그래서 또다시 가게 된 중국은 역시 다른 감흥을 주었다. 이번 여행은 처음으로 딸과 단둘이서 함께 했고,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한 느낌을 남겼다. 그래서 지난 1월 중국여행기를 3회로 나눠 정리해 보았다. <필자 주> 

[연재순서]

대륙을 보다(1): 농촌과 도시의 모습이 혼재된 래양시
대륙을 보다(2): 해상왕 장보고와 법화원
대륙을 보다(3): 아름다운 해변도시 위해시
▲도시계획에 따라 잘 정비된 위해시 저층아파트     © 박정필 시민기자

▲위해시 도로변의 주택들      © 박정필 시민기자
▲ 석도진 부두에 정박한  중국어선들    © 박정필 시민기자
진양 아버지의 승용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140키로 속도로 주행했다. 차창 밖으로 비쳐진 광경은 끝없이 넓은 평지뿐이었다. 2시간 만에 깔끔하고 잘 정비된 해변의 도시 위해시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진양의 아버지에게 그동안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언제든지 한국에 오시는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말을 건네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강씨의 차로 옮겨 타고, 며칠 전 전화로 약속한 곳으로 차를 몰았다.

1시간쯤 달렸을까. 석도진에 이르니 긴 부두에 낡은 어선들이 즐비했다. 어부들이 배에서 고기를 나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비릿한 냄새가 겨울의 찬바람에 실려와 코를 찔렀다. 일견에 이곳 사람들은 옛적부터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온 것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 초입    © 박정필 시민기자
장보고를 기리는 법화원 입구를 못 찾아 주민에게 두 번이나 물어본 후에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명신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단에 오르니 눈앞에 검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그 순간에 기분이 상쾌해져 쌓인 피로가 스르르 빠져나간 듯 했다. 안내판을 보니 장보고를 보호한다는 거대한 금빛 명신상이 뛰어난 기술로 세워졌다. 이런 건축분야는 우리보다 한수 위인 것 같다.

뒤편에 있는 민속박물관에는 옛 어부들이 사용했던 어구와 일상생활에서 사용했던 민속품들을 설명을 붙여 잘 진열해 놓았다. 우리의 것들과 유사해 눈여겨봤다. 지리적으로 산동성 지방은 한국과 지근거리에 있어 신라 때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했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어 고향땅 같은 느낌이었다. 고개를 둘러보면 병풍처럼 커다란 붉은 돌들이 산의 형세를 이뤄졌다. 그래서 적산(赤山)이라고 불리는 것 같다. 마치 분지구조가 생성된 것이다. 그 안에 여러 채의 사찰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세워져 더더욱 풍경이 수려했다.
▲  장보고 기념관 안내판    © 박정필 시민기자


장보고 동상은 법화원 뜰에 기개가 넘치고 용맹스런 모습으로 우뚝 서있다. 한참동안 눈길을 잡아맸다. 장보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보면 대충 이러하다.

지금의 전남 완도 출생인 그는 소년시절 정년이란 친구와 당나라에 건너가 무녕군중소장직에 올랐다. 이후 중국 산동성 석도진에 위치한 적산에 820년 법화원을 건립하여 유민들과 유학승들의 안식처를 제공하는 등 당나라에서 자치적인 집단을 이룬 신라방 신라촌의 총수가 됐다. 당시 일본인 구법승인 엔닌도 장보고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845년 최창법란 때 법화원은 헐려 황폐화되어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그 흔적은 볼 수가 없었다.
▲기개가 넘치고 용맹스런 모습의 장보고   동상     © 박정필 시민기자

일본은 천년 세월이 흐른 뒤 그 자리에 재빠르게 자국의 승려 엔닌을 기리기 위해 중국 당국과 협력하여 1900년에 법화원을 복원했다. 때를 맞춰 한국학계에서도 기념비를 세웠다. 그 비문 내용에는 장보고가 신라 당나라 일본 등 3국과의 교역을 주도한 것과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유대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장보고가 당에서의 활약상과 재당 신라인들의 기록을 가장 상세하게 남긴 역사적 문헌은 일본의 엔닌이 일기형식으로 저술한〈입당구법순례행기〉다. 이외에도 우리나라 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그의 기록을 많이 찾아 볼 수가 있다.

장보고는 신라인을 노예로 파는 것을 보고 격분, 귀국하여 조정에 이 사실을 보고하여 청해진대사로 임명되어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펼쳐 해적과 노예상을 소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시 해상세력이 커지자 신라 중앙정부에서 위협을 느낀 나머지 841년 11월 자객 염장을 보내 피살함으로써 해동왕국의 꿈은 물거품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이런 국내사정으로 보아 장보고에 대한 史實을 지웠을 것이다. 게다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서는 장보고를 되레 폄하시킨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     ©법화원 기념관 안에 장보고 장군의  모형도  박정필 시민기자


 
 
 
 
 
 
 
 
 
 
 
 
 
 
 
 
 
 
 
 
 
 
 
 

예나지금이나 시대에 따라 정치적 희생양은 있었다. 불행하게도 장보고는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게 아닐까. 법화원은 한국인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있단다. 그곳에서 강동구 모 초등생들과 어머니들 20명을 만났다. 중국은 한국인이 옛 정취에 흠뻑 빠지게 만들어 놓아 짭짤한 관광자원으로 삼는데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고 느껴졌다. 나 역시 옛 시절의 향수에 한껏 젖어 보았다.


▲     © 적산안에 있는 법화원  박정필 시민기자
▲     법화원 앞산에 세워진 명신상 © 박정필 시민기자


 
 
 
 
 
 
 
 
 
 
 
 
 
 
 
 
 
 
 
 
 
 
 
 
 
 
 
 
 
 
 
 
 
 
 
 
 
 
 
 
 
 
▲  법화원 전경   © 박정필 시민기자

▲     © 법화원 안에  봉안된  명신상  박정필 시민기자
▲  한국에서 법화원 뜰에 세운  기념비   © 박정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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