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卑怯]과 비굴[卑屈] 사이

당현증 전 부천시의원시민신문 | 기사입력 2021/01/24 [11:39]

비겁[卑怯]과 비굴[卑屈] 사이

당현증 전 부천시의원시민신문 | 입력 : 2021/01/24 [11:39]

▲ 당현증 전 시의원  

코로나19는 인류의 재앙인가 축복인가. 분명한 것은 기존의 사고와 행동 체계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는 사실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사회활동은 사람이 중심이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사회활동이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것을 다시 되돌아보게 한 계기가 코로나19라는 세기의 역병이다. 아직은 충격과 공포에서 온전히 벗어났다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나라 밖에서 전해지는 백신 접종 소식을 들으면서 점차 위안과 희망을 가져볼 수 있어 다행이다.

 

어려움이 선택을 강요하고, 태도를 결정하게 하는 계기도 마련해 주었다. 결정은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공공의 몫이고, 정부의 선택을 넘어 지도자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범위가 개인에 한정된다면 문제는 간단할 수 있지만, 국가나 국민을 향한 영향이라면 중심을 잡아야 한다. 파장과 여파가 지대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도자의 자세와 판단은 올바른 중심과 철학을 동반해야 한다. 그만큼 엄중해야 한다. 최근 ‘보여지는’ 통치자와 정치인들의 자세를 듣고, 보면서 문득 ‘비겁[卑怯]’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떳떳하지 못하고 겁이 많은 것을 일컫는 이 단어는 안타깝게도 올해의 단어인 ‘아시타비[我是他非]’와도 관계가 있다고 하면 무리일까.

 

신문 기사엔 “대통령은 좋은 일엔 나서지만 나쁜 일에는 뒤로 숨는다”는 글이 종종 보인다. 지도자의 자세는 국민의 격[格]이다. 흔히 정치인의 입신 자격을 평할 때 주로 <대학大學>에 등장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문구를 인용한다. 통치[자]의 단계와 스스로 평가한 자신의 격이다. 떳떳함을 떠올리는 자체가 안타까움이지만 말이다. 

 

오직 한 사람뿐인 지도자를 향해 비겁을 입에 올려야 하는 국민이나 언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슬픔과 분노를 불러온다. 행동이나 생각의 정당함을 중심에 두고 당당해야 하는 것에 반[反]하는 것이 비겁을 넘어 ‘비굴[卑屈]’로 향하기 때문이다. 내 나라 지도자가 어엿하지 못해 굽힐 일이 있다니 참담한 심정이다. 겁이 많고 마음의 중심이 없어 행동이나 태도가 바르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함을 비굴이라고 하면 국사[國事]에 무슨 비겁과 비굴이 있겠는가. 언론을 믿을 수 없다면 더 큰 일이고 문제가 심각할 터인데.

 

중요한 건 중심이다. 중심은 좌우와 상하와의 관계성이다. 판단이 법과 양심에 기대듯 중심은 시비의 판단을 위한 정당[正當]에 근거한다. 정당을 위한 냉정은 아상[我相]을 넘은 중상[衆相]의 관심도와 방향을 이끈다. 중심은 보여주기를 넘어 느낌을 동반하고 삶에 영향을 미친다. 중심의 잃음이 행동이나 태도의 표출로 이어져 끝내 바르지 못할 때 비겁과 비굴은 민낯을 보이기 마련이다. 바로 겁[怯]의 시작이다. 천심[天心]이 민심[民心]일 때가 그 바로미터는 아닐까.

 

지난 1년간 국민들은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세계적 역병을 겪으며 어려움을 감내해왔다. 국민은 규정을 따르고 지키고 견뎌왔다. 공직의 표상은 공성신퇴[攻城身退]와 솔선수범[率先垂範]이 아니던가. 당연한 직무를 보여주고 자랑하고 생색을 내는 건 격[格]의 문제를 넘어 품위의 지극한 손상이다. 왜 후안무치[厚顔無恥]가 아시타비 다음으로 자리한 것일까를 교훈으로 삼아야 할 주인공이 과연 누구일까.

 

비겁과 비굴 사이엔 떳떳함과 당당함이 중심이다. 행동과 생각의 정당함이 공인의 당연한 의무임을 아직도 채근해야 한다면 나라의 장래가 요원[遼遠]한 것이기에 돌아가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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