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향素鄕 이상로李相魯 시인을 다시 말한다(1)

부천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가입 3주년 기념 연재
이 세상, 얼마나 더 잠 못 이루고 기다려야 하는가!

구자룡 본지 편집주간.시인 | 기사입력 2020/11/09 [07:10]

소향素鄕 이상로李相魯 시인을 다시 말한다(1)

부천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가입 3주년 기념 연재
이 세상, 얼마나 더 잠 못 이루고 기다려야 하는가!

구자룡 본지 편집주간.시인 | 입력 : 2020/11/09 [07:10]

▲ 구자룡 시인 캐리커처  

문학은 그 시대의 시대상과 여러 군상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술의 한 장르이다. 그렇기 때문에 넓게 보면 세계요, 한국문학 이지만, 다른 면으로 볼 때는 한 지역의 작가가 뿌리내리고 있는 ‘향토적’ 특유성을 말함일 것이다. 시작하는 말

 
1889년 경인철도가 생겨나고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의해 개설된 소사역(자금의 부천역) 때문에 1914년 부천군, 1941년 소사읍이 형성되고 1973년 부천시가 탄생되었다. 부천의 경제문화는 급속도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중에 문학도 마찬가지다.

 
부천에는 어딘가를 거쳐 이주해 온 문인들이 많다. 부천을 거쳐 간 문인들도 많다. 그러나 변영로 시인 외에는 간혹 부천에서 나고 자란 부천의 문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 가운데 ‘소사가 고향’이라며 ‘소향素鄕’을 호로 쓰는 이상로 시인이 있다.

 
지금은 이방인異邦人 문인들에 밀려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졌지만 그는 분명 부천에서 태어난 ‘부천 시인’이다. 부천시가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가 된지 3년이 되었다. 그 기념으로 잊혀진 우리 부천의 시인 이상로를 재조명하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상로를 찾아 길을 나서다

 

▲ 소향 이상로  © 부천시민신문

소향 이상로 시인이 태어난 곳이 부천이라는 사실은 1953년 6월 1일에 발행한 월간 《현대문학》 통권 6호에 의해서 처음 알려졌다. 이 책 말미에 ‘한국현역작가 명단’이 수록되었는데 1952년 5월 1일 현재 기록이라고 했다. 6.25라는 한국전쟁 중이었지만 문인들 대부분의 주소는 피난처가 아니고 원래 살던 곳으로 되어있었다. 그 때 한국의 문인은 총 154명이었다.

 
가나다순에 의해 이상로는 108번째 수록되어 있었다. 본적은 경기도 부천이라 표기되어 있고, 주소는 서울 종로구 이화동 91의 3번지, 직장은 동아일보라고 기록돼 있었다. 1964년 발행한 《문학춘추》 제2권 4호에 수록된 ‘한국문필가 주소록’에도 이상로가 나온다. 주소는 서울 영등포구 상도동 30의 410번지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상로 시인이 부천 출신이라는 것을 부천에서 처음 안 것은 1978년이다. 작고한지 5년이 지난 후였다. 당시 한국예총 경기도지부 부천지구회(회장 최은휴)에서 발행한 《부천예총》 창간호 31쪽에 최은휴 시인이 부천의 문인을 소개한 ‘부천문단의 이력’에서 부터다.

 

“최근 발행된 <세계문예대백과사전>을 보면 이 땅의 문인으로서는 지금은 서울 편입된 오류동에서 태어난 소향 이상로 시인이 한명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수주 변영로 시인 외에 또 한 사람의 부천 출신 이상로 시인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 반가웠다. 그로부터 10년 후, 1987년 여름, 필자가 근무하던 소명여고 교지 《수련》 편집부 학생들(김금숙, 이영신, 황정원, 안희경, 김경미)을 데리고 이상로 시인을 찾아 서울 나들이를 한 적이 있었다. 부천이 고향인 한 시인을 찾아간다는 것은 필자나 학생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기억 못하는, 단지 부천 출신이라는 자료만 가지고 이상로 시인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록 33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아직도 내 가슴엔 새록새록하다. 그 때를 생각하며 이상로 시인의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이글을 쓰고자 한다. 그때 같이 갔던 아이들은 벌써 쉰 살이 넘었겠다. 

 
1987년 8월 10일,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다음으로 미룰까 하다가 아이들과의 약속이기에 서울행 전철을 탔다. 전철 안은 찜통이었다. 그 찜통을 안고 40여분 후 서울 시청역에 도착했다. 평소 이상로 시인과 친분이 있던 조선일보 이흥우 논설위원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렸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실로 들어섰다.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 선생님께서는 본인도 부천 사람이었다고 하신다. 고향이 인천 계양구인데 한때는 부천군이었다고 소개를 했다. 너무 반가웠다. 우리는 부천이 고향은 아니지만 현재 살고 있고, 부천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탁자 가운데 커피를 한 잔씩 놓고 이흥우 선생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소향 이상로 시인은 1916년 음력 10월 8일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1914년 수탄면에서 계남면으로, 1914년 소사읍으로 됨) 궁리宮里 산 10의 4번지에서 4남 3녀,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곳 궁리는 이상로의 19대 할아버지부터 300년간 조상대대로 살았던 곳이다.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두 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는 슬픔을 겪는다. 그리고 열 살 되던 해 1926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형제는 많았지만 고아신세가 된다. 그러나 꿋꿋하게 자란 그는 1929년 13세에 김포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19세에 서울에 있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다. 그리고 1937년,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21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명치학원 고등부를 다녔으나 더 배울 것이 없다며 1943년 중퇴하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이상로가 편찬한 ‘문장보감’에 의하면 일본에서 한때 방랑했다고 이력에 적었다. 어느 학교를 다녔거나 중퇴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일본 유학시절 문학에 심취해 1938년 이미 수필가로 활동을 하였고, 1941년 5월에 시 <訣別결별>을 발표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등단작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신문이나 잡지를 총해 등단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상로는 1946년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 소향 이상로의 저서 표지  © 부천시민신문

梧桐오동꽃으로 지난 마을을 마지막 떠나던 밤은 무지개 비처올 듯 찬란한 밤이였다. 그 밤은 港口항구의 輪船윤선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아무런 차림도 없이 떠났다. 뒤돌따 손수건 자락도 내저어 보이지 않았다. 다욱한 숲속, 푸른 하늘을 가슴한 湖水호수가에서 이미 옛 마을 먼 벗에게 <한 장 호수의 사연>을 떠울까 하였다.

멀리도 자꾸 멀리도 나는 다시 떠나… 사슴 잔등에 해 저물던 날, 피던 꽃포기에 황혼 어슬펴 오던 날, 산바람만이 이는 숲속에서 무슨 비밀을 누리는 듯 그냥 즐거웠다.

먼 마을에서는 벌써 한 두 홱 잦은 닭 울 무렵, 고스란히 00을 맞인 듯 오슬오슬 치웠다. 어디서 멀리 밀물 소리, 지즐대는 산새들… 하이얀 도라지 꽃으로 가슴을 치래하고 숲길을 더듬어 산길을 나섰다.

저렇게 잎 단 가지마다 손짓하는 靑山청산.

멀리 산 너머 아스무레 蓮연 하여진 그 너머 그리운 이랑, 아물아물 산길을 돌아 바윗등성이에 홀로래도 진종일 나는 즐거워라.   -1941년 5월 ‘결별訣別’ 전문

 

1944년 하복순과 결혼을 하고 1945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한국방송협회에서 발행하던 《협회 시대》 편집자로 근무를 했다. 이 사실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자신이 펴낸 책 《문장보감》(법조사. 1955)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책에는 ‘詩시 애기’라는 글을 통해 고국에 와서 처음 쓴 시 <문門>에 대하여서도 술회述懷했다.

 

 “그 졸작拙作의 제시提示 효과效果상 후부後部로 미루기로 하고 그 작품을 쓴 <때> 부터를 말하자면 1946년 6월입니다. 그 때의 우리의 현실이란 어더 했습니까?(중략) 이러한 상념想念의 일부분으로 <門문>이라는 졸작 후게後揭을 나았던 것 입니다.”

 

잡초들이 앞마당에 무성하고, 집안이 자욱히 먼지가 슬고, 쥐들은 눈이 벌게서 들끓고, 야반도 아닌 허다한 대낮에 도적은 마구들 넘나드니

 
두려워라, 두려워라, 도적이 두려워라.

몽곳에 자물쇠 맹꽁이 자물쇠……

문 열면 꽃은 피어나라. 문 열면 웃음은 피어라.

소란한 소리 소란한 소리, 가둔 가두니 어서 가두니 하고,

잠자는 사람, 어둠속 깊이 잠자는 사람들……

거칠은 마당에 꽃들 난만히 피고, 풍기는 향기 빛나는 자리에

모두들 한 자리에 앉어 부르는 노래 소리,

하늘에 연하는 노래 소리……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아아, 아름다워라.

가슴속 녹슨 자물쇠, 때 묻은 빗장을……

문 열면 꽃은 피어라. 문 열면 노래는 피어라. -1946년 6월 <문門> 전문

 

 그 후 <별빛 아래>(1947), <行路행로>(1948), <구름 日記일기>(1949) 등 1년에 한 편 꼴로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1955년에 출간한 시집《歸路귀로》에 수록되어 있다. 등단작 <결별>도 여기에 수록돼 있다. 1946년 와이엠씨에이에서 ‘예술의 밤’ 때 낭송했다는 시 <5월>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46년 이상로는 민중일보 기자를 거쳐 월간 종합지 《민성》과 문학지 《문화》 편집을 담당했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대구로 피난을 갔다. 그곳에서 문인들과 함께 《문총구국대》, 문인 스스로 나라를 지키자는 뜻으로 단체를 결성해 종군 작가로 활동을 하였다. 총이 아닌 펜을 무기로 삼아 전투에 임하여 나라를 지키자는 뜻이었다.

 
공군 장병들의 전투 의지를 앙양한 공군 창공구락부에는 16명의 문인들이 소속돼 있었다. 아동문학가 마해송(단장), 시인 조지훈(부단장), 소설가 김동리(부단장), 소설가 최인욱(사무국장), 유주현, 곽하신, 방기환, 박두진, 최정희, 박목월, 이한직, 박훈산, 전숙희, 김윤성, 황순원 등이었다. 그 후, 이 문인들은 근대 한국문학의 중추를 이루게 된다.

 
이 때 이상로는 본인의 특기를 살려 현재 발간되고 있는 ‘월간 공군’의 전신인 ‘코메트’지 및 전시 뉴스레터 성격을 띤 ‘공군순보’ 제작에 참여해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데 일조하였다. 9.28 서울 수복 후, 공보처 선전국 계장, 국방부 편수관 등을 역임했다.

 
1953년 7월 15일 이상로 시인은 대구애서 첫 시집 《귀로》 (14.5*18. 110쪽. 양장본. 백조사)를 출간했는데, 그 전쟁 와중에서 대구 향촌동에 있는 옥수 다방에서 출판기념회를 열 정도로 퍽이나 낭만적인 시인이었다. 전쟁 와중에 시집을 출간하는 일도 대단한데, 거기다 출판기념회까지 하다니 여러 시인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시집의 서문은 역시 친구 시인 박두진이 썼다.

 
1953년 전쟁이 휴전되자 서울로 돌아와 1954년 소설가 박종화가 사장으로 있던 서울신문사에서 월간 《신천지》 편집부장을 지냈다. 1956년 1월 동아일보에 편집국 촉탁이라는 특이한 직책으로 입사를 했다. 이때 새로 생긴 문화면을 기획 제작하는 문화부장의 직능을 뛰어나게 수행을 했다. 김성환을 발굴해 매일 연재만화 ‘고바우’를 기획해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계속해서 문화면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주 1회 1면이 배정되는 ‘소년동아’를 기획 제작 편집했다. 1964년 6월부터는 아예 ‘소년동아’ 부장으로 타블로이드판 ‘소년동아일보’의 제작 책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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