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패전국의 식민지는 하나 둘 해방을 맞았지만 일본을 포함한 승전국의 식민지는 해방이 될 수 없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서울․평양․의주․선천․안주․원산․진남포 등의 도시에서 일제히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국권피탈 후 억눌려 있던 우리 민족의 한이 폭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였고 이들 중 많은 수가 남대문역 광장 등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했습니다. 고종의 장례식을 참관하고 지방으로 돌아가는 참배객들에 의해 각 지방으로 만세운동이 퍼져 나가 3월 중순 이후에는 3‧1운동이 전국적 규모로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자 일제의 탄압도 거세지면서, 3‧1운동 시작 이후 3개월 동안 시위진압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고, 15,961명이 부상을 입었고, 46,948명이 구금되었습니다. 일제의 통계에 의한 숫자가 이 정도이니, 실제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상해를 입고, 목숨을 잃고, 감옥살이를 한 분들이 얼마나 많았을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은 3‧1운동을 통해 독립운동 방식의 체계화와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일제는 헌병경찰을 내세운 무단통치가 효용성을 잃었다고 판단하여 통치방식을 문화통치로 전환하였습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지난날 국가를 위해 희생‧헌신하신 애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위훈을 기리는 시설을 현충시설로 지정하여 국민의 나라사랑 정신 함양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독립운동 관련 현충시설 중 ‘황어장터3․1만세운동 기념관’과 같이 3‧1운동과 관련된 장소와 인물을 기리는 시설이 대다수인 것을 보더라도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3‧1운동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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